‘추사 이후 최고 명필’ 검여 유희강展
너무 커서 전시 못했던 ‘관서악부’… 유족이 작품과 유물 성대 기증 계기
전시공간 마련해 31일부터 특별전
길이만 34m에 이르는 종이에 빼곡히 글씨가 적혀 있다. 기계적인 맞춤도, 어색한 비대칭도 아닌 춤추는 듯한 리듬감이 3024자의 글자에서 흘러나온다. 한 글자씩 자세히 보면 칼처럼 날카롭다가도, 멀리서 전체를 보면 궁극의 예술혼이 주는 압도감에 숙연해진다.
21일 찾은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박물관의 한쪽 벽면에 걸린 서예 작품은 단번에 시선을 붙들었다. 한국 근현대 서예가를 대표하는 검여(劍如) 유희강(1911∼1976·사진)이 쓴 ‘관서악부(關西樂府)’의 전체 작품이 처음으로 전시된 것이다. 성균관대박물관은 “추사 이후 한국 최고의 명필이라고 평가받는 검여의 작품 100여 점을 공개하는 특별전 ‘검무(劍舞)’를 31일부터 진행한다”고 밝혔다. 성대박물관은 관서악부를 상설 전시하는 ‘관서악부실’도 공개한다.
검여의 유족은 최근 성균관대박물관에 검여의 작품 400여 점과 습작 600여 점, 벼루, 붓, 종이 등 관련 유물 1000여 점을 기증했다. 장남 유환규 씨(82)는 “가내 소장보다는 학계에서 연구하고, 시민들이 즐기는 게 아버지의 뜻이라고 생각해 아무 조건 없이 기증했다”고 말했다.
○ 글과 그림의 일체 이룬 예술
검여의 글씨에는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한 그의 여정이 담겨 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7년 명륜전문학교(성균관대 전신)를 졸업한 그는 중국 베이징으로 유학을 떠나 1946년까지 머물며 서화와 금석화, 서양화를 배웠다. 이때의 경험은 회화성을 가미한 검여 서예의 바탕이 됐다. 1945년 해방 정국에서는 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 주호지대장의 비서로 근무하며 임정 요원들의 환국에 앞장서기도 했다.
광복 후 귀향한 그는 본격적인 서예가로서 활동한다. 당시 그의 대표작은 ‘완당정게(阮堂靜偈)’다. 추사 김정희가 초의선사에게 준 정게(부처의 가르침 찬미)를 새로운 형식으로 창조한 작품이다. 화선지의 한가운데에 ‘나무아미타불’이라는 큼지막한 여섯 글자를 써서 마치 불탑을 형상화한 모습을 표현했고, 주변에는 추사의 시를 자신만의 행서체로 꽉 채워놓았다. 김대식 성균관대박물관 학예실장은 “추사를 가장 흠모했던 검여는 열심히 따라가는 ‘법고(法古)’를 넘어 새로운 개성을 펼친 ‘창신(創新)’을 실현한 서예가”라고 설명했다.
○ 신체장애 극복한 예술 정신
1968년 9월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시련이 다가온다. 뇌졸중이 발병해 실어증과 함께 오른쪽 반신이 마비된 것. “종이와 먹과 붓의 단판 승부”라고 표현될 만큼 서예는 손끝의 예민한 감각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데, 오른손 마비는 서예가로서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불굴의 의지가 새롭게 붓을 쥐게 했다. 평생을 써 온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글씨를 써 내려갔다. 쓰러진 지 10개월 만에 왼손으로 다시 서예를 시작한 그의 글씨를 보고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1919∼2009)은 “검여의 좌수서(左手書)는 기교 없이 서예 본질의 추구만이 남아 더욱 격조가 높았다”고 평가했다.
검여는 1976년 4월부터 일생의 역작인 ‘관서악부’를 쓰기 시작한다. 관서악부는 1774년 신광수(1712∼1775)가 평양의 아름다운 풍경을 풀어낸 시다. 당시 서예계에서 중국의 명문을 쓰던 관행과 달리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백미로 여겨지는 관서악부를 택한 점 역시 흥미롭다. 6개월간 작품에 매달린 그였지만 결국 그해 10월 발문의 일부는 완성하지 못한 채 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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