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이 색을 더해가는 5월 하순. 전남 여수 앞바다 대경도에 위치한 경도컨트리클럽(CC) 금오도 코스 6번홀. 페어웨이 왼쪽 끝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계속 이어지고 그 아래는 바로 짙푸른 바다가 펼쳐진다. 한려수도의 아름다운 섬들이 앞쪽에서 천연 방파제 기능을 하고 있어서인지 물결은 잔잔하다.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하지만 코를 간질이는 독특한 바다 내음 때문에 눈은 자꾸 바다 쪽으로 향한다.
캐디는 “이 홀의 길이는 340야드로 비교적 짧지만 핸디캡 3번의 까다로운 파 4 홀”이라고 설명했다. 공략의 핵심은 티샷을 200야드 이상 날려 오른쪽 페어웨이 벙커를 넘기는 것. 자칫 어깨에 힘이 들어가 티샷이 왼쪽으로 감기면 공은 바다로 날아갈 수도 있어 부담스럽다. 티 박스에 올라 최대한 힘을 빼고 부드럽게 드라이버를 휘둘렀다.
‘깡∼.’
경쾌한 타구 음과 함께 하얀 골프공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포물선을 그리더니 이내 벙커를 가뿐히 넘어간다. ‘굿샷’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함께 라운딩을 한 동반자는 “방칠거삼(方七去三)이라는 옛 선현의 말씀에 딱 맞는 샷”이라고 치켜세웠다. “무슨 뜻이냐”고 묻자 “주말 골퍼들은 거리에 목을 매는데 공자는 거리보다 방향이 더 중요하다는 뜻에서 방향이 7이고, 거리가 3이라고 말했다”면서 “알고 보면 논어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이라고 우겼다.
세컨드 샷 공략도 만만치 않았다. 왼쪽은 바다여서 여유가 없는 데다 그린 오른쪽과 뒤쪽으로는 벙커가 입을 벌리고 있어 거리와 방향 모두 정확한 샷이 요구됐다. 8번 아이언을 짧게 잡고 그린 오른쪽을 향해 가볍게 쳤으나 공은 그린을 오른쪽으로 조금 벗어났다. 다행히 그린 오른쪽 벙커는 피할 수 있었다. 어프로치를 한 후 짧은 거리 퍼팅에 실패해 아쉬운 보기를 기록했다. 18홀 내내 평소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지만 전혀 아쉽지 않은 라운딩이었다. 같이 라운딩을 한 또 다른 동반자는 “요즘이 경도CC의 풍광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때여서 오늘도 예약률 100%를 기록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여수에 사는 친구를 포함한 고등학교 동창 4명이 비용을 분담하기로 하고 일상 탈출을 감행한 보람이 있었다.
라운딩 후 경도CC 운영을 총괄하는 조대환 본부장을 만났다. 조 본부장은 “바다 조망이 가능한 18홀 골프장은 있지만 경도CC처럼 27홀 전 홀 티박스에서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골프장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면서 “미국 캘리포니아 페블비치골프링크보다 더 좋다는 칭찬을 들을 때 가장 뿌듯하다”고 자랑했다. 그는 이어 “여수의 온화한 기후 때문에 겨울에도 골프를 즐길 수 있는 데다 바닷가치고는 바람이 적고, 안개가 없기 때문에 휴장하는 날이 없어 지난해엔 연인원 12만5000명이 다녀갔다”고 덧붙였다. 서울에서 골프장까지 오가는 셔틀버스도 곧 운행할 계획이라고 소개했다.
경도(鏡島)는 고려시대 서울(京)에서 귀양 온 후궁(後宮)이 살던 섬이라고 해서 처음에는 경도(京島)라고 불렸다. 그러다 섬 전체가 고래(鯨)를 닮았다고 해서 경도(鯨島)로 부르기도 했다. 대략 구한말 일제강점기 이후부터는 섬 주위 바다가 거울(鏡)처럼 맑다는 뜻으로 경도(鏡島)로 불리고 있다. 여수 국동항에서 남쪽으로 500m 지점에 있는 섬이다.
경도의 두 섬 가운데 큰 섬은 대경도, 작은 섬은 소경도라고 부른다. 경도CC는 대경도에 있다. 대경도에서 가장 높은 구릉지에는 패총과 고인돌이 있을 뿐 아니라 골프장 안에는 수령이 650년이나 된 소나무도 있어 오래전부터 사람이 들어와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도CC는 금융그룹 미래에셋그룹이 개발 예정인 경도해양관광단지의 중심 시설. 현재는 전남도 산하 전남개발공사가 개발 완료한 골프장과 객실 100실의 최고급 리조트만 운영 중이다. 지난해 미래에셋은 이를 인수함과 동시에 2024년까지 1조3850억 원을 투자해 214만3353m²(약64만 평)에 6성급과 4성급 호텔 2곳과 콘도, 워터파크, 해수풀, 쇼핑센터 등을 건설하겠다는 본계약을 전남도와 체결했다. 명실상부한 남해안권 관광벨트의 중심축으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대경도와 여수 신월동을 연결하는 연륙교도 여수의 랜드마크로 손색이 없게 건설할 예정이다.
경도CC 라운딩을 마친 다음 날 일정은 금오도 비렁길 걷기.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대표적 트레킹 코스라고 한다. 여수 친구는 “비렁길은 한 번도 와보지 못한 사람은 많지만 한 번만 온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로 비밀스러운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라고 자랑했다. 비렁은 순우리말인 벼랑의 여수 방언이다.
금오도는 돌산읍 신기항에서 카페리로 25분 걸린다. 2010년 개장한 비렁길은 해안선을 따라 5개 코스, 총길이 18.5km로 조성돼 있다. 금오도에서 태어난 관광해설사 최은숙 씨는 “1시간이 걸리는 1코스도 비렁길의 묘미를 잘 느낄 수 있지만 2시간이 걸리는 3코스가 절경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짧은 1코스부터 맛보기로 했다.
1코스 입구에서 완만한 오르막 오솔길을 30여 분 걷자 탁 트인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넓은 바위가 나타났다. 바다에서 수직으로 치솟은 바위였다. 미역널방이다. 과거 마을 주민들이 바다에서 채취한 미역을 해수면에서 90m 높이인 이곳까지 지게로 지고 와서 널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그들의 삶의 무게가 전해져 오는 듯해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연인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는 30대 중반 김재민 씨는 “비렁길은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하늘과 산과 바다의 풍광을 즐길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친구들도 연신 휴대전화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바다웽이의 갯장어 데침회
여수하면 먹을거리를 빼놓을 수 없다. 경도는 갯장어의 본고장이다. 단백질이 풍부해 여름철 최고의 보양식으로 꼽히는 갯장어는 회 또는 데침회로 많이 먹는다 .
여수에서는 갯장어를 하모 또는 참장어로 부르는데 하모는 일본어다. 과거엔 전량 일본으로 수출했으나 지금은 거의 국내에서 소비한다 .
경도CC 인근 식당 바다웽이는 깔끔한 밑반찬과 함께 갯장어 데침회를 제대로 맛볼수 있는 소문난 맛집.
5년 전 문을 연 식당 주인 진희경 씨만의 비법으로 만든 육수에 갯장어를 살짝 데쳐 먹는다. 살짝 삶은 부추와 함께 갯장어를 양파에 얹어 한입 넣자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한 식감을 느낄수 있었다. 마늘을 곁들이면 마늘과 양파가 갯장어의 비린내까지 잡아줘 부담 없이 즐길수 있다.
음식솜씨와 함께 진 씨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고교 1학년 아들이다. 드라이버 샷을 300m나 날리는 골프 유망주란다. 진 씨의 아들 자랑과 함께 술과 갯장어 데침회가 어우러지는 5월의 밤이 깊어만 갔다.
여수=글·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사진·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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