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발레계의 메시, 호날두요? 발레 불모지에서 ‘K-발레(한국발레) 붐’을 일으킨 걸 생각하면 발레인 모두가 그 정도 자부심은 가져도 됩니다.”
1세대 한국 발레의 역사를 짚을 때면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 단장, 강수진 국립발레단 단장, 허용순 안무가, 김인희 서울발레씨어터 단장 등의 이름이 입에 오르내린다. 그중 문훈숙 단장(56)은 발레리나로 활동한 뒤 30대부터 발레단을 물려받아 국내에서 가장 큰 민간발레단으로 성장시킨 ‘발레가 곧 인생’인 인물이다. 유명 래퍼토리는 물론 창작발레 ‘심청’ ‘발레 춘향’ 등 수준 높은 작품을 선보이며 한국 발레의 위상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 문 단장을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발레단에서 만났다. 문 단장은 “그런 별명이 정말 맘에 든다”며 “정말 아무것도 없던 30년 전과 수많은 한국인 무용수가 세계 각지에서 활약하는 요즘 한국 발레의 위상을 비교하면 감회가 남다르다”며 소녀처럼 미소 지었다.
18년 전 현역 은퇴를 선언하며 “직접 무대에 서는 것보다 단장으로서 세계적 발레단을 만드는 일에 전념하고 싶다”고 했던 그는 바람대로 요즘 시간을 분, 초 단위로 쪼개 발레단에 헌신하고 있다.
지난달 민간발레단 연합인 ‘발레STP협동조합’ 일원으로 ‘발레갈라 더 마스터피스’ 공연을 마쳤고, ‘백조의 호수’ 프랑스 파리 초청 공연도 준비하고 있다. 6월 말엔 대한민국 발레축제의 폐막 공연이 있고, 7월에도 충무아트센터에서 레퍼토리 ‘지젤’ 공연을 한다.
문 단장은 “발레라는 나무가 아름답게 형성되고 뿌리가 흔들리지 않으려면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해외에 비해 아직 토양이 얕은 한국 발레를 위해 할 일이 훨씬 더 많다”고 했다. 무대에 대한 욕심도 끝이 없었다. “‘백조의 호수’ 파리 공연을 앞두고 최고의 공연을 위해 낡은 의상을 전부 손보려 했는데 시간이 부족했다”며 아쉬운 기색도 드러냈다.
발레단 경영자로서의 끝없는 노력과 별개로 심정적으로 힘든 일도 많았다. 그가 운영하는 선화예중·예고와 발레단을 거친 뛰어난 인재들이 해외로 ‘스카우트’되는 날이면 마치 자식을 떠나보내는 것처럼 펑펑 울었다.
“키워 놓으면 다 해외로 가버리는 것 같아 한때는 매일 울 정도로 우울했죠. 그러던 어느 날 한 감독이 ‘단원이 훨훨 날아가도록 하는 게 우리의 소명’이라는 얘기를 했는데 좀 위안받는 느낌이었어요. 단원들이 결국 다시 한국에 돌아오면 한국 발레에 큰 자양분이자 날개가 될 테니까요.”
문 단장은 인터뷰 말미에 미국의 한 낡은 교회에서 처음 발레 공연을 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가 맡았던 역할은 ‘도토리 줍는 다람쥐’였다.
“제 인생이 곧 발레라지만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을 때도 많았어요. 그래도 부모님 덕분에 발레를 만나 도토리를 줍듯 이 길을 걸어올 수 있었으니 행복한 사람이죠. 풍요로움을 준 발레에 늘 감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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