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김포시의 복합문화공간 ‘나인블럭 아트스페이스 김포’. 카페와 함께 운영되는 이곳 전시관에는 495m²(약 150평) 규모의 텅 빈 공간이 있다. 관람객이 들어서면 60여 대의 빔 프로젝터가 작동하고, 삭막했던 바닥과 벽돌은 캔버스가 된다. 흐르는 음악과 함께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속으로 온몸이 푹 잠기는 듯한 경험을 선사하는 이 공간은 ‘반 고흐 인사이드2: 더 라이트 팩토리’ 전시의 하이라이트인 메인 미디어홀이다.
이번 전시는 2016년 옛 서울역사인 서울 중구 문화역서울284에서 석 달 동안 관객 15만 명이 찾은 ‘반고흐 인사이드’의 후속 전시다. 전시를 기획한 미디어앤아트의 지성욱 대표는 “상영되는 콘텐츠의 스토리는 물론이고 벽면과 바닥까지 5개 면에 이미지를 매핑(대상물에 영상을 비춰 다르게 보이도록 하는 기술)하는 방식도 순수 국내 기술과 자본으로 만들었다”며 “아이들과 함께 오는 주부 관객을 포함해 지역 주민들의 호응이 높다”고 말했다.
최근 ‘반 고흐 인사이드2’와 같은 ‘이머시브(immersive·몰입경험)’ 요소가 문화계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 ‘이머시브’란 ‘에워싸는 듯한’, ‘실감 나는’ 등을 의미하는 단어로, 가상현실(VR) 기기 등을 이용해 완전히 다른 공간에 푹 빠져드는 몰입적인 경험을 의미한다.
공연예술계에서는 ‘이머시브 시어터’가 오래된 화두다. 2003년 영국 극단 펀치드렁크의 ‘슬립 노 모어’를 통해 촉발된 ‘이머시브 시어터’는 무대의 경계를 없앤 체험적 요소가 특징이다. ‘슬립…’은 배우가 호텔로 개조한 여러 공간에서 연기하고 관객이 3시간 동안 공간을 넘나들며 개별적 경험으로 이야기를 좇는 구조로 미국 뉴욕과 중국 상하이에서 꾸준히 상연 중이다.
이머시브 붐은 전시, 연극, 영화 같은 장르의 경계마저 무너뜨린다. ‘레버넌트’ ‘버드맨’ 등을 연출한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육체와 모래’가 대표적이다. 온두라스와 과테말라 난민들이 미국 국경을 넘는 사투를 다큐멘터리 영화, 설치미술, VR의 장르를 넘나들며 생생하게 보여준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 미술관(LACMA)에서 2년 넘게 전 회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업계는 올해를 이머시브 열풍의 분수령으로 보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세계 영화제 가운데 VR 섹션이 있는 곳은 지난해 40여 개에서 올해 110여 개로 껑충 뛰었다. 27일 개막하는 부천 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4년째 이어온 VR 섹션을 크게 확대했다. 김종민 프로그래머는 “예술의 흐름이 VR, AR(증강현실), MR(혼합현실)를 넘어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XR(확장현실)로 가고 있다”며 “올해 개막식에 이머시브 공연인 ‘스마트폰 오케스트라’를 전진 배치하는 등 세계의 첨단 이머시브 콘텐츠들을 보여줄 예정이다”라고 했다.
이머시브 요소가 지닌 ‘체험’의 중요성은 순수 예술에도 영향을 미친다. 지난달 개막한 제58회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미술전에서도 전시관을 인공 해변으로 바꿔 바닷가에 온 듯한 체험을 하게 한 리투아니아 국가관이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미술그룹 랜덤 인터내셔널의 젖지 않고 빗속을 통과하는 설치 작품 ‘레인 룸’도 영국 런던 바비컨센터와 LACMA, 상하이 유즈 미술관 등을 순회할 정도로 인기다.
이머시브 열풍은 4차 산업혁명으로 가속화되고 있다. 다양한 정보를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인터넷의 발달로 문화계 콘텐츠는 정보의 일방적 전달보다 상호작용과 감각을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특징이 두드러진다. VR나 AR, 3차원(3D) 프로젝션 매핑 등 다양한 기술 발전이 체험의 효과를 극대화했다.
다만 ‘이머시브’는 원천 콘텐츠를 더 풍부하게 하는 기술일 뿐 맹목적으로 추종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나온다. 한 전시기획사 대표는 “예술 작품은 원화로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있다”며 “기술 발전만 추구하기보다 그 안에 담을 콘텐츠에 대한 고민도 많아진다면 시너지 효과가 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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