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인의 결사대 “나를 쏴라”… 日경찰 총 빼앗은뒤 육박전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6월 22일 03시 00분


[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61화> 경남 창녕

23인의 결사대원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는 창녕군 영산면 남산의 ‘3·1독립운동기념비’. 이곳에서 23인의 결사대원이
독립만세운동을 결의했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23인의 결사대원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는 창녕군 영산면 남산의 ‘3·1독립운동기념비’. 이곳에서 23인의 결사대원이 독립만세운동을 결의했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금일 오등(吾等)이 독립운동을 전개함은 조선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를 절대 지지하고 중앙에 호응하여 완전한 독립 주권국을 전취(戰取)하자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등은 정의를 위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을 것이며 대한독립을 한사코 전취할 것을 맹세하고 이에 서명 날인함.’(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3’)

1919년 3월 13일 오후 1시, 경남 창녕군 영산면 읍내의 남산(남산봉) 자락에서 청년 23명이 결의한 ‘결사단원맹세서(決死團員盟誓書)’의 내용이다. 10대에서 20대 나이의 청년들은 맹세서에 지장을 찍으며 ‘이 운동에서 일보라도 퇴각하는 자는 다른 단원으로부터 생명을 빼앗길 것’이라고 결의했다. 이들의 비장한 결의는 이후 창녕 지역 곳곳에서 펼쳐진 독립운동의 촉매제가 됐다. 그 결과 남산은 ‘영산호국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운동의 성지가 됐다.

청년들이 독립운동을 맹세한 자리에는 ‘3·1운동독립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높이 4.6m의 기념비석 하단에는 2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3일 이곳을 찾은 ‘영산3·1독립결사대 유족회’의 권정동 회장은 “매년 3·1절 이곳에서 결사대 후손들이 모여 위령제를 올린다”고 말했다.

○ 육박전 벌인 23인의 결사대

영산의 독립만세 운동은 경성 보성학교 졸업생이자 천도교도인 구중회(당시 나이 21세)로부터 시작됐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자 보성학교 교장인 최린의 제자였던 구중회는 경성 3·1운동 준비단계 때부터 고향에 내려와 지역 만세운동을 도모했다. 이 소식을 접한 장진수(25), 김추은(24)은 흔쾌히 계획에 동참했다. 고향 친구이자 천도교도였던 세 사람은 수십 명을 규합했지만 정보 보안 등을 이유로 결사대원을 24명으로 한정했다. 24명 가운데 한 명인 하찬원은 처가가 있는 경남 함안 만세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맹세서에 이름을 넣지 못했다.

그렇게 남은 23명의 결사대는 치밀하게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밀양, 의령, 함안 등 이웃 지역과 연락망을 개설하고 다량의 목판본 태극기를 제작했다. 또 요약본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시위용 농악대도 조직했다.

거사일인 3월 13일, 결사대는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개춘회(開春會·봄맞이 하는 모임) 명목으로 약속 장소(현 3·1봉화대 자리)에 모였다. 구중회의 결의문 낭독을 시작으로 대원들은 품안에 숨겨뒀던 태극기를 꺼내 휘두르며 “대한독립만세” “약소민족 해방만세”를 외쳤다.(영산3·1독립운동유족회, ‘봉화’)

결사대는 곧이어 읍내로 진출했다. 징, 장구, 북 등 군물(농악)을 앞세우고 남산 줄기를 따라 내려오는 대원들의 모습은 장엄했다. 대원들이 도산 안창호가 작곡한 독립군가인 “무쇠팔뚝 돌주먹 소년 남아야, 애국의 정신을 분발하여라”(소년행진곡)를 부르자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이에 놀란 영산주재소의 일제 경찰들은 읍내로 진출하는 다리목인 만년교(萬年橋)에 저지선을 만들었다. 시위대가 나타나자 일경은 선두에 있던 결사대원 하은호를 개머리판으로 때려 쓰러뜨렸다. 이에 김추은이 “나한테 총을 쏴라”라고 외치며 일경에 달려들어 총을 빼앗고 육박전을 벌였다. 만년교 주위의 미나리꽝에서 결사대원과 일경 간에 난투극이 펼쳐졌고, 이 틈을 이용해 시위대 본진은 읍내로 나아갔다.

영산 23인 결사대와 일경이 맞부딪친 만년교 위에서 결사대 후손들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영산 읍내로 진출하려는
결사대와 이를 저지하려는 일경은 만년교 밑의 미나리꽝에서 치열한 육박전을 벌였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영산 23인 결사대와 일경이 맞부딪친 만년교 위에서 결사대 후손들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영산 읍내로 진출하려는 결사대와 이를 저지하려는 일경은 만년교 밑의 미나리꽝에서 치열한 육박전을 벌였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영산 시장터에 도착한 결사대는 독립선언서와 결사대 선서문을 낭독했고, 결사대가 나누어준 태극기를 손에 든 군중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호응했다. 일경은 삽시간에 늘어난 시위 규모에 압도돼 구경만 해야 했다. 600∼700명에 달하는 시위대는 읍내를 누비며 행진하다 해가 저물어서야 해산했다.


○ 전원 체포된 결사대원들


시위 상황을 보고받은 창녕경찰서 소속 일경들은 창녕 장날(3월 14일)에 맞춰 시위를 준비하던 결사대를 급습했다. 장진수, 남경명 두 대원이 일경과의 격투 끝에 체포됐고, 나머지 대원들은 비밀 장소로 피신했다.

일경의 습격에 분노한 결사대원들은 곧장 2차 만세운동에 들어갔다. 13일 오후 8시 다시 남산에 모여 봉화를 지폈다. 시위대가 ‘덩기덕 쿵덕’ 장구를 치자, 영산사람들은 하나둘씩 죽음을 각오하고 모여들기 시작했다.(‘봉화-영산 3·1독립운동소사’)

결사대원들은 창녕경찰서를 습격해 구금된 동지들을 구출하거나 그것이 어려우면 다 함께 유치장에 들어가자고 결의했다. 독립만세 함성과 장구 소리를 앞세운 시위대는 영산 읍내에서 12km 떨어진 창녕경찰서로 향했다. 두 차례 시위에서 농악을 무기로 삼은 것은 영산만세운동만의 차별화된 특징이다. 2차 만세운동은 일경과의 혈투극으로 끝이 났고, 결사대를 이끌던 구중회는 부인과 함께 체포됐다.

이튿날인 3월 14일, 체포를 피한 결사대원들은 창녕장터에 다시 모였다. 장날이었지만 장꾼들은 보이지 않았다. 일경이 만세운동을 막기 위해 파시(破市) 조치를 취한 탓이었다. 대원들은 굴하지 않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했고, 일부는 “감금된 동지를 구출하자”며 창녕경찰서로 돌진해 육탄 항거를 벌였다. 이날의 항거로 결사대원 23명은 모두 체포됐다.

23인의 의거는 이후 펼쳐진 독립만세운동의 촉매제가 됐다.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던 창녕군 남지에서는 3월 18일 장날에 수백 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일으켰다.(정호권 판결문) 결사대원들을 대거 배출한 영산보통학교(현 영산초등학교) 학생들도 들고 일어났다. 영산보통학교 학생들은 3월 26일 “우리들은 결사대의 뒤를 이어 이 운동에 목숨을 내어 놓는다”는 결의문을 작성한 뒤 영산 장날 시위를 주도했다. 보통학교 학생들은 그해 3월 말까지 영산의 우편국 전화선을 끊거나, 일경의 정보원 노릇을 한 일본인들을 몰아내는 등 지속적으로 항일 운동을 펼쳐나갔다.


○ 혹독한 고문

일경에 체포된 결사대원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23명 모두 1919년 5월 8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재판을 받았다. 구중회, 김추은, 장진수 등 주도자급 3명은 징역 10개월, 면서기 하은호 등 10명은 징역 8개월, 나머지 10명은 징역 6개월을 언도받고 마산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영산 만세운동으로 체포된 김추은(왼쪽) 구남회(가운데)
장진수 세 결사대원이 출옥 직후인 1920년 3월 말에
촬영한 기념사진.
영산 만세운동으로 체포된 김추은(왼쪽) 구남회(가운데) 장진수 세 결사대원이 출옥 직후인 1920년 3월 말에 촬영한 기념사진.
형기를 마친 결사대원들 대부분은 고문과 옥고로 몸이 성치 않았다. 갓 신혼살림을 차렸던 임창수 지사(21)는 이듬해인 1920년 3월 불귀의 객이 됐다. 조삼준 지사(1976년 작고)는 80세 평생을 불구의 몸으로 살았다. 조 지사의 아들 조진규 씨(80)는 “아버지는 수감 생활 당시 왜경의 고문으로 인해 부러진 한쪽 다리가 곪았지만 치료를 받지 못했다. 상처 부위에 구더기가 들끓어 수감자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셨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구중회의 동생인 구남회, 구판돈, 권재수 등 10대 결사대원들은 옥고가 직간접적인 원인이 돼 40세를 넘기지 못한 채 1930년대에 모두 사망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결사대원들의 조국 독립에 대한 열망을 막지는 못했다. 결사대원 상당수는 출옥 후 중국, 일본, 연해주 등지로 건너가 활동했고 귀국해서는 청년운동, 소년운동, 농민운동, 노동야학운동 등을 통해 영산 사람들의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결사대원을 이끈 구중회 지사는 출옥 후 “일본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며 일본 와세다대에서 유학한 뒤 고향에 돌아와 결사대원 하상준 등과 함께 ‘사월회’라는 모임을 조직해 청년 운동을 이끌었다. 또 15세 전후의 소년들을 대상으로 영산야학교를 운영하며 교육사업에 투신한다. 구 지사는 광복 후에는 제헌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50년 6·25전쟁 당시 북한군에 의해 납북됐다.

강직한 성품으로 일경에 맞섰던 김추은 지사는 1930년 35세를 일기로 세상을 뜰 때까지 사비를 들여 소년교육운동과 농민운동 등을 펼쳤다. 그가 결사대원인 장진수, 구남회 등과 함께 ‘영산소작인회’를 조직해 일본인 지주들에 맞서고, 소작인들의 권리 보호에 나선 일은 동아일보에 소개되기도 했다.(동아일보 1923년 4월 8일자)

김 지사의 사망 후 가족에게 남겨진 유산은 ‘빚잔치’였다. 김 지사의 손자 김상현 씨(73)는 “빌려간 돈을 갚으라면서 차압 딱지가 집으로 날아와 남은 식구가 빚을 갚느라 엄청 고생했다”고 말했다. 일제의 눈 밖에 난 집안이라 도움 구하기도 어려웠던 김 지사의 두 아들은 초등학교만 간신히 졸업했다. 둘째 아들(김이권)은 어린나이에 일본 광산에서 유황 캐는 일로 돈을 벌어 빚을 갚는 데 보태기도 했다.

23인 결사대는 영산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권정동 유족회 회장(권재수 지사 손자)은 “영산 사람들은 23인 결사대원의 후손이라면 지금도 다시 한번 얼굴을 쳐다봐 준다”고 밝혔다.


▼ “납북된 독립운동가 구중회, 北정권 정치적 이용에 협조 거부” ▼

北행적 밝혀진뒤 1990년 건국훈장

“6·25전쟁 당시 북한으로 납북된 독립운동가와 국회의원 등 유명 인사들은 세 부류로 나뉘어 관리됐습니다. 먼저 북한에서 결혼을 해 자식을 낳고 살겠다는 부류로 임정 요인 엄항섭 선생, 제2대 국회의원을 지낸 오화영 선생 같은 분들이 이에 해당했습니다. 이분들은 사후 애국열사릉에 안장됐습니다. 두 번째는 북한 여성과 결혼을 하되 자식을 두지 않겠다는 부류로,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구중회 선생 같은 분들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혼자 살겠다는 분들로, 이분들은 무조건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며 단식 투쟁 등을 벌이곤 했습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부류에 해당하는 분들은 걸핏하면 김일성 면담 요구와 성토대회 등을 벌였는데, 납치된 소장파 그룹의 대표인 구중회 선생이 늘 선동에 나서곤 했습니다.”

경남 창녕군 영산면 ‘구중회
추모 통일농원’에서 구자호씨(오른쪽)가 6·25전쟁으로
아버지인 구중회 지사(액자
사진)가 북한군에게 납치당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경남 창녕군 영산면 ‘구중회 추모 통일농원’에서 구자호씨(오른쪽)가 6·25전쟁으로 아버지인 구중회 지사(액자 사진)가 북한군에게 납치당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6·25전쟁 당시 남한의 중요 인물 납치 계획부터 납북된 인사들을 관리해 온 북한 고위급 간부 출신 ‘김선생’(가명)이 1980년대 말 구중회 지사의 아들 구자호 씨(전 세종문화회관 이사장)에게 밝힌 얘기다. 납북된 아버지의 행방을 찾기 위해 노력하던 구 씨는 관계 기관의 협조로 김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김선생에 따르면, 김일성은 자신이 항일 독립운동가라고 선전했기 때문에 납북된 독립운동가들을 함부로 다루지 않았다. 중요 인사들을 조국평화통일위원으로 추대하는 등 예우도 갖추었다. 하지만 납북 인사들 대부분은 북한 정권의 정치적 이용에 협조하기를 거부했다.

구중회 지사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9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구 지사의 이북 행적이 밝혀진 뒤였다. “아버지가 22년이나 서훈을 늦게 받게 된 이유는 6·25전쟁 때 정부가 한강 다리를 끊어버려 피란을 갈 수 없게 만든 탓입니다. 아버지가 이북에 붙잡혀 간 것도 억울한데 독립유공자 선정 담당 부처는 강제 납북 증명서를 떼서 오라는 거예요. 그걸 증명할 길도 없고, 피해자인 유족이 해야 할 일입니까?” 구 씨는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불쾌하다고 말했다.

창녕=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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