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4일 오후 서울 성북구의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신경림 시인(83)이 잔잔한 웃음으로 일행을 맞았다. ‘해방 40년의 문학’, ‘연려실기술’…. 거실 벽면을 메운 책장엔 누런 더께가 쌓인 책들이 빼곡했다.
“오늘 주제는 ‘한국시의 가능성에 대한 생각과 개인적으로 잊히지 않는 사건과 장면’입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예술위)가 진행하는 ‘한국 근·현대 예술사 구술채록 사업’ 현장. 시인과 마주 앉은 김춘식 동국대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교수가 5차 채록 주제를 알리자 일행의 눈이 일제히 시인의 입에 꽂혔다. 영상과 사진 촬영자, 기록자, 현장 총괄이 원로 예술인의 업적과 생애 전반을 듣고 찍고 기록한다. 이 사업은 문학·연극·음악·미술·대중예술 분야의 예술인을 두루 만나고 있다.
예술위 측은 “2003년 처음 시작해 지금까지 315명의 채록을 마쳤다. 집중적인 구술면담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외부인은 참석하지 않는 게 원칙이다. 사업 시작 16년 만에 언론이 함께하는 건 처음”이라고 했다.
“좋은 세상에 태어났으면 학교 선생 하고 연금 받아서 해외여행도 다녔을 텐데….” “문학으로 만난 사회와의 불화가 계속 이어져서 평생 지고 가게 된 것 같아.”
시인이 유년 시절, 문학에 빠져든 과정, 모진 시대를 견딘 기억을 찬찬히 꺼냈다. 대체로 평온했지만, 때로 격정적이고 이따금 촉촉한 표정으로 이야기하길 1시간. 채록자인 김 교수가 휴식 시간을 알렸다. 카메라가 꺼지고 모두가 참았던 숨을 시원하게 내뱉는다.
채록 작업은 보통 2시간씩 5번 10시간 내외로 진행한다. 촬영영상은 편집 없이 그대로 보관한다. 발화(發話)한 내용뿐 아니라 침묵과 표정, 땀까지 기록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오래전 일이라 흐릿한 기억이나 잘못된 정보는 ‘각주’ 처리한다. 아픈 기억일수록 노년에 이르러 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부분도 그대로 기록한다”고 했다.
“요즘은 갈등이나 번민이 거의 없어. 삶의 종언에 이르렀다는 뜻이겠지.”(신 시인)
쉬는 시간에도 가벼운 이야기가 오간다. 올해 채록 대상은 8명. 문학 분야는 신경림 시인이 유일하다. 가장 중요한 인물 선정 기준은 시급성이다. 대다수가 노년인지라 삼고초려를 해 섭외를 한 직후에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구술을 끝내자마자 이승을 등진 경우도 있다.
“바보 같은 데가 있는 게 시인이지.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뺀질’하고…. 그런 게 시인은 아니라는 생각을 들게 만든 게 조지훈 시인이지.”
다시 카메라가 켜지고 시인이 말을 잇는다. 구술에서 뭣보다 중요한 건 채록자와의 호흡이다. 하나의 인생을 두고 마주한 두 사람의 인연과 관점에 따라 이야기의 방향과 깊이가 달라진다. 정보원 아르코예술기록원 과장은 “구술 채록은 사실 발굴보다 마음속 이야기를 오롯이 이끌어내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본질”이라고 설명했다.
2시간 반 넘게 이어진 채록이 끝나면 저녁 자리에서 회포를 푼다. 신 시인의 단골집인 동네 냉면 가게로 자리를 옮겼다. 진짜 구술은 공식 구술을 마친 이후부터라는 이야기가 있다. 내밀한 시간을 공유한 이들끼리 “라포르(rapport·친밀감과 신뢰)”가 형성되고, 술이라도 한 잔 돌면 꾸밈없는 속내가 나온다. ‘구술 이후의 구술’까지 마친 시인이 가만히 말했다.
“제대로 이야기한 것 같지 않고, 많은 이야기를 빠뜨린 것 같고…. 충분히 이야기한 것 같은데 이상하네. 그런데 더 하라면 못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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