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무적의 칼이니 이로써 하늘에 거스르는 악마와 나라를 도적질하는 적을 한 손으로 무찌르라….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
1919년 3·1운동이 펼쳐질 당시 만주 지역에서 공표한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의 내용이다. 민족대표 33인이 국내에서 작성한 기미독립선언서가 주로 외교적 내용에 치중돼 있는 것과 달리, 강력한 무장투쟁 독립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선언서가 주목 받는 이유는 내용뿐 아니라 작성 시기 때문이다. 3·1운동 관련 독립선언서 가운데 가장 빠른 1919년 2월(음력 1918년 12월)에 제작돼 무오독립선언서라는 별칭을 얻었다. 도쿄 2·8독립선언서와 국내 기미독립선언서에 영향을 줬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최근 대한독립선언서의 작성 시기가 기존 통설과 달리 1919년 3월 11일(음력 2월 10일)이란 연구 결과가 나왔다.
박성순 단국대 교수는 지난달 28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학술대회에서 공개한 논문 ‘1919년 대한독립의군부와 길림군정사의 역사적 의미’에서 “1919년 대한독립의군부의 핵심 일원이던 지산 정원택(1890∼1971)이 남긴 ‘지산외유일지’에서 1919년 음력 2월 10일 즉, 1919년 3월 11일 대한독립선언서가 만들어졌다는 내용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그동안 작성 시기를 혼동해 무오독립선언서로 불러 온 용어에 대해 수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지산외유일지에는 1919년 1∼3월 긴박했던 만주 독립운동가들의 움직임이 음력 날짜와 함께 상세하게 적혀 있다. 1919년 1월 24일(음력 1918년 12월 20일) 정원택은 신규식(1879∼1922)으로부터 한 통의 밀서를 전달 받는다. “파리강화회의에 맞춰 국내외 동지들이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있으므로 만주에서도 준비하라”는 내용이었다.
정원택은 이 밀서를 받아들고, 여준(1862∼1932)을 찾아간다. 여준은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지내고, 생계회 부민단 등 각종 독립운동단체를 이끈 만주지역 실질적 지도자였다. 여준은 비밀리에 독립운동가들을 규합한 끝에 1919년 2월 27일(음력 1월 27일) 자신의 집에서 조소앙, 김좌진 등과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한다. 여준이 총재를 맡고, 군무에 김좌진, 정원택은 서무를 담당했다.
3월 1일(음력 1월 29일) 정원택은 “오후에 상하이로부터 온 전보를 접하니, 한성이 이미 움직인다고 했다”고 기록했다. 이어 3월 2일(음력 2월 1일) “조소앙과 상의해 선언서를 기초했다”는 내용에 이어 3월 11일(음력 2월 10일) “선언서 4000부를 석판으로 인쇄해 서북간도와 상하이, 일본 등 각국에 우편으로 발송했다”는 활동이 날짜와 함께 정확히 적혀 있다. 박 교수는 “대한독립선언서에는 ‘1919년 2월’이라고만 적혀 있고, 관련 사료가 부족하다 보니 무오년에 발표했다는 오해가 생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한독립선언서를 태동시킨 대한독립의군부는 선언에 그치지 않고, 곧바로 군사단체인 길림군정사로 확대·개편한다. 이후 대한정의단과 합쳐져 북로군정사를 결성해 이듬해인 1920년 한국 독립전쟁사에 길이 남을 청산리대첩의 승리를 이끈다. 박 교수는 “대한독립선언서에 담긴 무장투쟁정신은 훗날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광복군으로까지 이어졌다”며 “그동안 부족했던 만주지역의 독립운동사 연구가 활발해지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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