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63화> 경남 하동
비밀결사
일신단이 활약했던 경남 하동군 고전면에 세워진 ‘3·1독립운동의거 기념비’. 뒤쪽에 보이는 지소마을에서 독립운동가 7명이
배출됐다. 올해 3월 1일 악양면 최참판댁과 드라마 ‘토지’ 세트장에서 펼쳐진 만세운동 재연 공연(오른쪽 사진). 하동=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하동군 제공
만세시위 열기가 전국으로 퍼져 나가던 1919년, 영호남을 잇는 교통 요충지인 경남 하동군에도 3·1운동 소식이 전해졌다. 북쪽으로 지리산을 등지고, 남쪽으로 바다 건너 남해군과 연결되며, 서쪽으로 섬진강을 경계로 전남 광양시와 접한 하동은 각종 물화(物貨)가 모이는 곳이다.
서울에 이어 전라도와 경상도 곳곳에서 만세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에 하동군민들은 고무됐다. 하동군과 남해도 사이 해협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충무공 이순신의 노량해전과 지리산 일대에서 맹활약했던 항일 의병을 자랑으로 여겨온 하동군민들은 일제의 강압적인 통치에 맞서 일어섰다.
하동 만세운동은 3월 13일 하동읍 장날에 첫 시위가 발생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고전면에선 민족대표 33인을 본떠 만든 33인의 비밀결사단체 ‘일신단’이 맹활약했고 군청 소재지였던 하동읍에선 보통학교 학생들이 소풍날에 시장에서 기습적인 만세시위를 벌여 일본인 교장과 군수, 일제 경찰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1919년 3월부터 5월까지 하동군에서 17차례의 만세시위가 발생해 17명이 숨지고 95명이 부상했으며 50명이 체포됐다는 기록이 있다.
○ 사표 쓰고 만세시위 벌인 적량면장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정세기 등이 주도한 하동시장 만세시위 하루 뒤인 3월 14일 박치화 적량면장(건국훈장 애족장·사진)이 갑자기 사표를 던졌다. 전국적인 의거 소식을 듣고 민족적 양심의 가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적량면지’는 박치화가 고종 서거와 3·1운동 전국 확산 등의 소식을 듣고 괴로워했다며 일신의 출세보다는 민족의 대의를 생각하기로 결단을 내렸기에 사표를 내던진 것이라고 적었다. 하동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오대식 사무국장은 “일제의 공직을 갖고 시위를 주도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해 사임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의아해하는 부하 직원들을 두고 면사무소를 나선 박치화는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고 치밀하게 거사를 준비했다. 사랑방에서 큰 태극기를 만든 그는 태극기를 달 수 있는 대나무 장대도 준비해 하동시장 내 지인 집에 맡겨뒀다.
장날인 3월 18일 하동시장에 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오후 3시경 시장 중앙에 쌓은 소금가마니 위로 올라선 박치화가 품속의 태극기를 꺼내 장대에 매달아 흔들며 “일본은 조선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연설했다. 이어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수천 명(일제 기록은 약 1500명)의 장꾼들과 주민들이 따라 만세를 불렀다.
기습 시위에 허를 찔린 하동경찰서는 완전무장한 병력 20여 명을 출동시켜 군중을 해산시키고 박치화를 체포했다. 박치화는 고문을 받고 재판에 회부돼 1년간 옥고를 치렀다. ○ 곳곳에서 유혈 충돌
‘독립운동사’와 ‘경남지역 3·1독립운동사’에 따르면 박치화 1인이 주도하고 군중이 호응한 3·18 하동시장 시위 이후 만세시위가 본격적으로 확산됐다. 하동군 의거 항쟁의 첫 봉화가 올랐다는 평가(‘적량면지’)가 나올 정도로 파급력이 컸다. 금남면 출신 정낙영 등이 바다 건너 남해군으로 들어가 3월 20일 남해읍 장날 만세시위를 주도했다가 체포되는 등 하동군 밖으로까지 영향을 미쳤다.
3월 24일 하동군 옥종면에서 하일로 주도로 6000여 명이 안계시장과 주재소 앞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주재소 정문에 큰 태극기를 세우고 일경의 총을 빼앗아 내동댕이치는 일까지 벌어지자 일경이 발포로 대응했다. 박치화가 만세를 외쳤던 하동시장에선 3월 23일 일신학교 교사 정섬기 등이 주동해 700∼800명이 다시 만세를 불렀다.
3월 29일 진교면 진교리 시장에선 1000여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치다 일경과 충돌했다. 3월 30일 진교리 시위대는 전날 붙잡힌 주동 인물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를 포위했으나 지원 병력이 도착하면서 어쩔 수 없이 해산했다. 시위대 1000여 명은 진교리 시장 장날인 4월 6일 다시 봉기했다. 이들은 일본군과 일경을 포위한 뒤 총기를 빼앗고 곤봉과 죽창으로 뭇매를 때려 일본군 2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급파된 일본군과 일경 10여 명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면서 3명이 숨지고 7명이 부상했다. 김정명의 ‘조선독립운동’은 진교리 시위대의 끈질긴 저항에 대해 “일제의 경제적 침탈에 시달려 온 연해(沿海) 지역 농민들의 항일정신을 잘 드러낸 것”이라고 평가했다.
○ 일신단 “우리가 주모자다”
고전면 성천리 지소마을의 박영묵은 인근 마을 동지 33인을 규합해 비밀결사 일신단을 만들고 죽을 때까지 싸우자고 결의했다. 정재기가 하동읍에 가서 독립선언서를 구해오는 역할을 맡았는데 가는 도중 체포됐다. 일경이 만세시위 계획을 파악하고 경계를 강화하자 일신단은 4월 6일 주교리시장(배다리시장) 장날을 거사일로 정했다.
거사 당일 일신단원들은 지게를 지거나 농립모(농사지을 때 쓰는 모자)를 쓰고 장꾼으로 가장해 시장에 잠입했다. 박영묵이 단상에 큰 태극기를 들고 올라가 의거 취지를 설명하고 만세를 삼창하자 매복해 있던 나머지 단원들이 나타나 태극기를 흔들었다. 1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를 따라 외쳤다.
이때 일제 경찰과 헌병 5명이 출동해 시위를 막으려 하자 일신단원들이 달려들어 총검을 빼앗고 모자와 제복을 벗긴 뒤 구타했다. ‘시위대가 총기를 탈취하고 병졸에게 상해를 가해 점점 기세가 올랐으나 수비대의 급원(急援)에 의해 겨우 해산시켰다’는 일경 기록은 당시 상황의 급박함을 잘 보여준다.
크게 망신을 당한 일제 헌병 20여 명과 경찰 10여 명은 7일 오전 총을 난사하면서 지소마을로 쳐들어왔다. 주모자를 체포하기 위해서였다. 일신단은 부녀자와 아이들을 뒷산으로 피신시키고 마을 앞 정자나무 아래에서 이들을 기다렸다. 일제 군경이 총구를 겨누며 다가오자 박영묵 정상정 이종의 정의용 등 4명이 앞으로 나서 “어제의 일은 우리 4인의 짓이며 그 외는 모두 장꾼들이다. 책임은 4인에게 있으니 체포하라”고 외치고 포박을 받았다. 일신단원 1명은 일제 군경이 마을로 접근해 오면서 쏜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박영묵 등 4명은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현재 지소마을 앞에는 주민들이 1982년에 건립한 ‘3·1독립운동의거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하동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정연가 회장은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나선 박영묵은 글을 배우지 못했으나 의협심이 강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며 “비밀결사가 활약한 지소마을은 독립운동가를 7명이나 배출한 곳”이라고 말했다.
○ 보통학교 학생들의 의거
고전면 지소마을에서 총성이 울렸던 4월 7일 하동읍에선 하동공립보통학교 학생 130여 명이 하동시장에서 단체로 만세를 외쳤다. ‘하동의 독립운동사’ 등에 따르면 일본인 교장과 교사는 소풍날을 맞아 학생들을 광평송림으로 데리고 가던 중이었다. 박문화 등 4학년 주동자들은 일반 학생들에게 태극기를 몰래 나눠주며 귓속말로 시위 계획을 알렸다. 주동자들은 거사 사흘 전인 4월 4일 기숙사에서 열린 비밀회합에서 5∼10전씩을 갹출해 태극기 50장을 만드는 등 시위를 치밀하게 준비했다. 주동자들은 비밀회합에서 “우리 학생들도 궐기해 의거를 결행하자. 학생이라고 보고만 있을 수 없다”며 의지를 다졌다.
7일 오전 11시 40분경 약속했던 시장에 다다르자 학생들이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시장에 있던 장꾼들까지 시위에 참가했다. 일본인 교장은 일부 여학생들까지 가담한 돌발 사태에 놀라 학생들을 교실에 가뒀다. 군수가 급히 달려와 학생들을 훈계한 뒤 귀가시켰고 헌병대가 학교를 경비했다. 보통학교 시위를 주도한 박문화는 3·18 하동시장 시위를 벌인 박치화 전 적량면장의 친동생이다. 독립유공자공훈록에 따르면 박문화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의 형을 선고받았다.
하동군에서 시위가 잠잠해진 5월 1일에는 하동보통학교 학생들이 추가 봉기를 호소할 목적으로 적량면 동산리에서 하동읍에 이르는 도로의 가로수들에 ‘대한독립만세’라고 적힌 전단 10여 장과 미농지로 만든 태극기를 몰래 붙였다. 같은 달 3일엔 하동보통학교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축구경기를 하다 기습적으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일경들이 이를 제지하자 조롱과 욕설을 퍼부으며 만세를 더 외쳤다.(‘독립운동사’)
▼ 독자적으로 만든 ‘대한독립선언서’… 집 천장에 숨겨 보관 ▼
박치화 선생 살던 곳서 1986년 발견… “서명 12인 보호 위해 숨겨 놓은 듯”
“저기 보이는 하늘색 대문 집입니다. 저 집에서 문서가 발견됐습니다.”
지난달 25일. 경남 하동군 적량면 두전마을의 오르막길을 앞장서 걷던 한 주민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니 고가(古家) 한 채가 보였다. 언뜻 봐도 사람이 살지 않은 지 오래된 듯했다. 마당엔 풀이 무성했고 슬레이트지붕 위에 덧씌운 양철판은 붉게 녹슬어 있었다.
기자와 동행한 하동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정연가 회장은 “1919년 3월 18일 하동시장 시위를 주도했던 박치화 선생이 살던 집으로 지금은 폐가”라며 “당시 시위에서 그가 낭독했던 독립선언서 원본이 1986년 집을 수리하던 중 천장에서 우연히 발견됐다”고 설명했다.
우리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되 비폭력과 무저항주의를 강조한 대한독립선언서 원본(국가지정 기록물 제12호)은 현재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박치화 등 하동 시위 주동자 12인이 연서한 이 문서가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독립선언서라는 사실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박치화는 왜 선언서를 천장 속에 숨겨 놓았을까. 하동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오대식 사무국장은 “동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연서한 선언서가 일제 경찰의 손에 들어갔다면 관련자들이 잡혀갔을 텐데 서명자들이 만세운동 뒤에 잡혀갔다는 얘기는 없다”며 “서명자 후손들을 만나 보면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옥고를 치렀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덧붙였다.
▼ 하동에서 제작된 대한독립선언서 ▼
황천이 주시고 신명이 도우사 세계평화의 회의(會議)가 창개(刱開)됨을 반(伴)하야 민족자결의 여론이 병기하는 차 호시운(好時運)이 내(來)하얏도다…주저치 말고 관망치 말고 우리의 사업을 우리의 심력(心力)으로 자결단행(自決斷行)합시다…최후의 일인과 최후의 일각까지 폭동(暴動)과 난거(亂擧)는 행치 말고 인도(人道)와 정의(正義)로 독립문으로 전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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