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융합-모양 파괴 ‘출판 혁명’
그림 10장이 ‘소설 오프닝’ 역할
활자-시-그림 결합 새 영역 개척, 장르 넘나들며 다양한 변신 시도
컵 받침 모양에 단편소설 한편… 휴가철 수영장 겨냥한 작품도
#“다이어리야, 에세이야, 그림책이야?” 최근 서점을 방문한 김아영 씨는 ‘당신은 나를 열어 바닥까지 휘젓고’(알마)를 들고선 고개를 갸웃했다. 동그랗게 깎인 모서리 모양과 멋스러운 표지는 영락없는 다이어리인데, ‘안희연 짓고 윤예지 그리다’를 보면 책이 분명했다. 활자, 시, 그림을 결합한 ‘활자에 잠긴 시’(활잠시)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이다.
#직장인 이선형 씨는 틈만 나면 인스타그램에서 책 영상을 ‘느낀다’. 얼굴 없는 목소리가 책을 낭독하는 동안 화면에는 그림, 음악, 자막이 흐른다. 김 씨는 “마치 ‘낭독채널+영화 트레일러’ 같다. 내용은 유익한데 시각적으로 덜 피로해서 좋다”고 했다.
책의 시조 격인 파피루스 두루마리가 탄생한 지 5000여 년. 이후 책은 무언가에 새겨진 글자의 형태로 존재해 왔다. 최근 이런 책의 개념이 바뀌고 있다. 크기 모양 재질 같은 물성은 물론이고 시 소설 에세이 등 장르의 경계도 허물어지는 추세다. 전자책 오디오북 유튜브까지 가세하면서 전통적인 독서의 개념마저 흔들고 있다.
예술·문학서를 주로 내는 출판사 알마는 시각적 요소를 결합해 새로운 독서 경험을 제공한다. ‘활잠시’ 시리즈는 시인과 그림 작가가 각각 산문과 그림으로 예술가를 오마주한다. 안지미 알마 대표는 “표지와 내지, 텍스트와 그림, 장과 장의 경계가 흐릿해 예술품처럼 느껴진다고들 한다. 시인과 그림 작가의 상상력이 만나 제3의 상상력을 창조한다”고 했다.
눈으로 읽는 데서 벗어난 책도 있다. ‘듣는 책’을 표방하는 오디오북은 기본. 오디오북 업체 ‘윌라’는 최근 신용카드 크기의 카드형 오디오북을 선보였다. ‘보이지 않는 책’에 대한 편견을 돌파하기 위한 책이라는 게 윌라 측의 설명이다. 휴머니스트와 미메시스는 북토크 음원을 덧입힌 전자책으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USB 오디오북도 최근 독자와 만났다.
책의 ‘사용법’도 진화하고 있다. 시집 ‘내 벽장 속의 바다’(을궁)는 다이어리처럼 장마다 메모 공간을 뒀다. 민음사는 조만간 컵 받침 크기에 방수 재질인 ‘코스터북’을 출간한다. 장강명 김세희 작가의 단편 소설 6편이 책마다 1편씩 담겨 “휴가철 수영장에서 음료와 함께 즐기는 책”을 지향한다. 실제 컵 받침으로 사용할 수 있다.
창비의 ‘소설의 첫 만남’ 시리즈는 형태의 반전으로 타깃 계층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성석제 김애란 등 작가가 썼는데, 큰 활자에 거의 모든 페이지마다 삽화가 실렸다. 담당 부서도 청소년출판부다. 황혜숙 창비 편집3국장은 “청소년과 20대 초반을 타깃으로 하는 미국의 ‘영 어덜트(Young Adult)’ 소설의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독특한 물성의 책도 눈에 띈다. 올해 선보인 알마의 ‘FoP’(포비든 플래닛)와 ‘GD(Graphic Dionysus)’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공상과학(SF) 시리즈인 FoP는 영화 오프닝처럼 시작한다. 그림 작가가 10장 내외로 작품을 소화해 그림으로 풀어낸다. GD는 책을 무대처럼 꾸민 희곡집이다. 클라이맥스로 치달으며 암전되거나 막이 바뀌는 순간 그래픽으로 호흡을 끊어주는 식이다. 스릴러의 불안한 심리를 반영하려 책 한 귀퉁이를 사선으로 자른 범죄 논픽션 시리즈인 ‘시그눔(signum)’도 있다.
인터넷 출현 후 짧아진 텍스트가 독서 환경을 바꾼 걸까. 아니면 낮은 독서율이 살길을 찾아 책이 속성을 바꾸게 한 걸까.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는 “책의 변화는 부정할 수 없는 흐름이다. 출판계가 이 흐름에 자연스럽게 동참하다 보면 기존의 가치에 새로운 미덕을 더해갈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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