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지망생에서 성악가로, 포토그래퍼에서 동물보호 운동가로…. 패션 사진작가 김태은(46)이 살아온 인생은 한 마디로 단정 짓기 어렵다. 언제나 고독했지만 늘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그는 남들의 시선보다는 내 마음 속 심장의 두근거림에 충실한 삶을 찾아왔다.
지난 주 경기 양평군 서종면에 있는 한 전원주택. 벨을 누르자 흰털이 부슬부슬한 거대한 개와 알록달록한 점박이 무늬가 달린 날렵한 사냥개, 갈색의 다리 짧은 개 등이 한꺼번에 짖으며 문 앞으로 달려와 꼬리를 흔들었다. 7마리의 크고 작은 반려견과 함께 살고 있는 김 작가의 집을 방문한 첫 느낌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5분도 안돼 곧 덩치 큰 녀석들의 사랑스러운 애교에 푹 빠져버렸다.
“10년 전쯤이었어요. 촬영 팀에서 소품용으로 강아지를 한 마리 샀어요. 그런데 촬영 후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강아지를 안 챙기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제가 박스에 담겨진 강아지를 데려왔지요. 그 때부터 꼬였어요, 제 인생이. 한 손으로 안고 왔던 조그만 강아지가 글쎄 50㎏이 넘게 커버렸지요. 얘가 ‘구름이’라는 친구예요.”
김 작가는 요즘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반려견이 패션화보 주인공처럼 멋지게 차려 입힌 사진을 찍는다. 마치 클래식한 미술작품의 인물 초상화처럼 촬영한 견공들은 사실은 모두 유기견 출신이다. 울산의 한 보호소에서 안락사 위기에 처한 200마리의 유기견을 구조한 동물보호단체를 통해 직접 입양한 아이들이다.
“지금은 이렇게 고급스런 자태를 뽐내고 있지만 사실 이 아이들이 제게 처음 왔을 때는 볼품이 없었지요. 다들 공포에 질려 있었고, 눈빛에 불안이 가득했어요. 살도 삐쩍 마르고…. 내 사진에서 만큼은 최대한 예쁘고, 아름답게 꾸며주고 싶었지요. 사진을 화인아트 종이에 인쇄한 뒤에 제가 직접 수채화로 꽃을 채색한 뒤에 스캐닝해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지난해 서울 강남구 논현동 모스가든에서 반려견 패션화보 작품을 전시했다. 아름다운 유화처럼 찍힌 유기견의 사진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미술과 음악에서 패션사진으로
김 작가는 초등학생 시절 화실에 다녔다. 그러나 미술에서는 특별한 흥미도 재능도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선화예중 시험도 떨어졌다. 미대를 나와서 성악가 남편과 결혼해 이탈리아 로마에 살던 고모가 “태은이는 신체적 조건도 좋고, 목소리도 좋으니까 성악을 시켜봐라”고 권유했다. 결국 17살의 나이에 로마로 유학을 갔다. 어학코스와 성악레슨을 마치고 소프라노 조수미가 다녔던 로마 산타체칠리아 음악원에 입학했다. 당시 신입생 20명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한국인이었다고 한다.
한 이탈리아 학생이 그에게 다가왔다. “너도 한국 사람이니? 한국에는 음악이 없니? 왜 다 여기에 와서 음악을 공부하려고 하니?”라는 물음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자존심에 상처 입은 마음으로 잠이 들었는데, 국악고등학교에 다시 입학하는 꿈을 꿨다. 열심히 성악을 공부했지만 전공교수로부터 “너는 성량도 좋고, 고음도 잘나고 모든 게 완벽한데, 감정표현력이 떨어진다”는 말을 들었다.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려면 사랑도 해봐야 하고 가슴 아픈 이별도 해봐야 절절한 노래가 나오는데, 그렇지 못한다는 질책이었다.
결국 그는 성악가로서 성공하지 못하고 4년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허송세월로 젊음을 낭비하던 그는 20대 중반에 우연히 사진을 접하게 됐다. 패션사진 스튜디오에서 어시스트로 일하던 친구 덕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 성악, 무용 같은 클래식 예술만 접해왔던 그에게 사진은 짜릿한 신세계였다. 그는 “암실에서 사진을 처음 인화해봤을 때 신비하고 짜릿한 기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를 때는 쑥스럽고, 부끄러워 감정표현을 하지 못했는데, 카메라라는 기계를 통해 제 감정의 ‘퍼텐셜’이 그야말로 ‘펑’ 터져버렸다”고 말했다. 그는 제대로 사진을 공부하기 위해 다시 이탈리아 피렌체로 떠났다. 스물일곱 살의 늦은 나이었지만, 뒤늦게 배운 사진의 재미에 심장이 팍팍 요동쳤다. 그러나 이제 행복하게 온 몸을 바쳐 하고 싶은 분야를 겨우 찾았는데, 아버지 사업이 망해 귀국해야 할 사정에 처했다. 너무나도 슬프고 외롭고, 고독한 시간이었다.
●등 뒤의 불꽃과 같은 인스피레이션
위기의 순간, 김 작가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촬영한 뒤 휴식 차 유럽에 화보촬영을 온 배우 장동건이었다. 그는 10박11일간 피렌체, 밀라노, 베네치아를 오가며 화보 촬영 뿐 아니라 촬영스태프들의 하루 세끼 식사주문과 교통편 예약, 통역까지 총괄하는 역할을 맡았다. 첫날부터 촬영 팀이 가방을 도둑맞고 여권을 잃어버리고, 사건사고의 연속이었다. 따로 사진 촬영할 시간이 없어 24시간 장동건에게 붙어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찍었다. 잘 때도 찍고, 앉아서 쉴 때도 찍고, 거울 보면서 세수할 때도 찍었다. 10박11일간의 다이어리, 다큐멘터리 사진처럼 촬영한 패션화보였다.
3개월 뒤 귀국했을 때 김 작가는 스타가 돼 있었다. 장동건의 거칠지만 자연스럽게 표현된 화보가 패션잡지에 장장 30페이지에 걸쳐 실렸다. 남자 배우의 화보가 패션잡지에 이렇게 많은 지면에 실린 것은 사상 처음이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가 관객 1000만 명이 넘어서며 흥행에 성공한 덕분도 컸다.
그로부터 몇 달 뒤 또 다른 톱스타 배우 원빈이 연락이 왔다. 장동건 화보집을 보고 배우 원빈이 직접 “이 작가와 찍고 싶다”고 연락이 온 것. 체코 프라하에서 진행된 첫 촬영 날. 그는 원빈에게 “지금 이 순간, 정말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다. 원빈은 “여행을 하고 싶다”고 답했다.
김 작가는 2박3일간의 사전에 계획된 모든 일정을 취소했다. 그리고 기차표를 끊고 빈티지 자동차를 렌트해, 정처 없이 여행을 떠났다. 기차 칸에서 사진을 찍고, 고속도로의 허름한 호텔에서 잠을 자며 촬영했다. 군대가기 1년 전의 불안한 마음의 톱스타 배우, 한국에 돌아와서 1년도 안돼 혼란스러운 상태의 포토그래퍼. 두 젊은이의 흔들리는 감정이 카메라 뷰파인더에서 사정없이 부딪쳤다. 그는 목에 하나, 손목에 하나, 어시스트가 멘 중형카메라까지 3대의 카메라를 저글링하면서 미친 듯이 찍었다. 두 사람은 마주 보며 달리기도 하고, 소리를 외쳐가며 거침없이 셔터를 눌렀다. 그는 “내 인생의 최고의 작업이었다”고 말했다.
“패션사진 작가들은 뭔가 완벽히 세팅이 돼야지만 셔터를 누르는 습관이 있습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초점이 맞아야 하고,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죠. 조리개 값은 얼마이고, 노출은 몇으로 맞추어야 한다는 공식이 있죠. 그러나 저는 초점이 맞지 않아도 누르고 싶을 때 막 찍습니다. 셔터 누르는데 어떤 공포도 없어요. 내 뒤에서 타오르는 불꽃에 충실할 때, 인스피레이션(영감)이 살아 숨쉬는 사진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장동건과 원빈의 작업 탓에 그는 수많은 소문에 시달렸다. 쟁쟁한 선배 작가들을 제치고 무명의 신인작가가 톱스타와 작업을 했으니 그럴만했다. 그는 이후 이영애와 공효진, 이효리, 배두나, 황정민 등 유명배우와 가작업을 이어나갔다. 또한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의 캘린더 사진특집 편에도 출연해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사진은 기계적인 테크닉이 전부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림도 그렸고, 음악도 했고, 홀로 고민하면서 청춘을 방황하던 다양한 경험이 제 패션사진에 자연스럽게 담긴 것 같습니다.”
젊음의 요동치던 방황에서 한발 비켜선 그는 요즘 구본창 작가의 사진을 새롭게 보고 있다고 했다.
“요즘 구본창 선생님이 하얀 눈밭에 놓은 박스 안에 백구 5마리를 찍은 사진을 보고 너무 좋았어요. 백자 사진도 좋고요. 엄청난 흑백의 콘트라스트로 강렬한 남자 누드를 찍었던 과거의 작품과는 너무 달랐어요. 나도 나이가 들면 저렇게 평온하고, 이성적이고, 차갑고, 따듯한 시선을 가진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예전엔 사진가들이 꽃과 나무를 찍는 게 이해가 안 갔는데, 이제는 저도 그런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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