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에서 인종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은 없다. 피부색에 따라 인간을 규정할 수 없을뿐더러 도덕적으로도 옳지 않다는 인식이 통용되기 때문이다. 유대인을 학살한 홀로코스트는 명백한 반인륜적 범죄이며 ‘열등한’ 흑인을 노예로 삼았던 제도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인종 갈등으로 내홍을 겪은 국가는 제도적 불평등을 고쳐나가며 과오를 씻어내는 듯하다.
인종주의는 정말 사라졌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종주의는 건재하다. 저자는 인종주의가 자유, 평등같이 인류가 쟁취한 절대적 가치마저 무력하게 할 만큼 강력하며 시대상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할 뿐이라고 말한다.
일본 도쿄대에서 ‘영국의 우생학 운동과 모성주의’로 박사학위를 받고 10여 년간 인종주의 연구에 천착한 저자는 인종주의를 “낙인”이자 “배제” 그리고 “인종적 타자의 몸을 먹고 자란 ‘히드라’”라고 표현했다. 책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속성에 근거해 타자를 분류하고 가치를 매긴” 19세기 인종주의의 기원부터 그 이데올로기의 토대가 된 ‘몸 담론’을 짚는다. 백인우월주의를 비롯해 유대인, 아프리카인, 이슬람인이 겪었던 역사와 풍부한 통찰이 이해를 돕는다.
두개골, 피부색, 머리카락 등 외적 요소가 판단 기준이 된 19세기의 ‘생물학적 인종주의’는 21세기에 들어 젠더, 문화, 경제, 종교적 특징과 결합했다. 양상은 당연히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저자는 오늘날 인종주의가 문화와 정체성의 차이뿐인 것처럼 은폐되는 특징이 있다고 지적하며 “신인종주의” “인종 없는 인종주의”라고 명명한다.
마지막 장에서는 한국 내의 인종주의를 다뤘다. ‘백인과 구별되는 아시아인’으로서 과거 인종주의의 피해자로만 여겨지던 한국인은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며 인종주의의 주체가 됐다고 지적한다.
무심코 사용하는 ‘한국형 미인’ ‘그리스 조각 미남’ ‘혼혈인’ 같은 일상적 표현부터 피부색이 다른 한국인이 겪는 아픔을 마주하면, 인종주의를 마냥 ‘몰상식한 자들의 오류’로만 치부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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