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65화> 충북 괴산
저녁 무렵 홍범식(1871∼1910)은 재판소 서기 김지섭을 불러 상자 하나를 주면서 집으로 보냈다. 금산군수로 부임한 홍범식은 고향 충북 괴산을 떠나 관아의 객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귀가한 김지섭이 열어본 상자에는 가족에게 보내는 유서가 들어 있었다.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어떻게 하든지 조선 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되찾아야 한다.” 경악한 서기는 군수를 찾아 나섰다. 곳곳을 수소문하던 서기와 고을 사령들이 군수를 찾아낸 곳은 객사 뒷산 소나무였다. 경술국치의 날이었다.
아들이 아버지의 유언을 실행에 옮긴 것은 9년 뒤였다. 괴산의 자택 사랑채에서 아들은 동향의 청년들과 머리를 맞댔다. 괴산 3·1운동의 시작이었다.
○ 지축을 울린 만세소리
홍범식의 장남 홍명희(1888∼1968)가 만세운동과 인연을 맺게 된 데는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이 계기가 됐다. 고종의 국장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했던 홍명희는 충북 청주 출신 의병장 한봉수를 만나고 함께 손병희를 방문한다. 이 자리에서 홍명희는 손병희로부터 3·1운동에 대한 설명을 듣고 만세 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는다.(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3·1운동사’)
홍명희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겸 학예부장이자 역사소설 ‘임꺽정’의 작가로 활약한 사람이다. 3·1운동 당시 그는 일본에서 유학하다 부친의 자결 소식에 귀국한 터였다.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목도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직후인 1919년 3월 18일 자택에서 숙부 홍용식과 함께 만세운동을 도모했다. “당시 괴산군 관내에는 홍명희 이재성 등 의혈 청년을 비롯한 홍씨 문중의 지식인들이 제제다사(濟濟多士)”(‘3·1운동사’)였기에 논의는 빠르게 진행됐다. 홍명희는 인근 괴산공립보통학교와 청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에게도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그는 자택에서 작성한 선언서에서 “최후의 1인까지 조선의 독립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어떻게 하든지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부친 홍범식의 유서를 떠올리게 하는 내용이다.
만세 시위를 논의한 이날에 대한 재판 기록은 다음과 같다. “3월 18일경 홍명희 집에서 19일 괴산 장날 군중에게 반포하여 한국 독립운동을 할 목적으로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것을 결의하고, 홍명희는 스스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뜻이 실린 선전문을 작성하여 이것을 이재성에게 주어, 이재성은 이것을 18, 19 양일간에 자택에서 홍용식과 같이 이재성의 소유인 등사판으로 300매를 인쇄하고 19일 괴산 시장에서 군중에게 이것을 반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러 독립운동을 하자고 군중을 격려하여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3월 19일은 저녁 무렵 시작됐다. 이날 낮 괴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읍내를 활보하며 준비에 나섰다. 이들을 수상하게 여긴 일제 경찰이 학생 3명을 구금하고 읍내 경계를 강화했다. 하지만 시위자들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홍용식과 홍명희 등은 학생들과 함께 오후 5시경 괴산읍내 장터에 모인 사람들에게 선언서를 배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괴산공립보통학교 4학년 급장 곽용순도 학생 35명과 같이 학교를 뛰쳐나왔고 청주공립농업학교 학생 홍태식도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독려했다. 학생들은 종이로 만든 태극기를 흔들었고 군중들은 화답하듯 만세를 소리쳤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는 ‘3·1운동사’에서는 이날의 함성을 “지축을 울린 만세 소리”라고 묘사했다.
삼엄한 경계를 뚫고 나온 만세 소리에 당황한 일제 경찰은 홍명희 이재성 홍용식 등 주도자 18명을 체포하고 태극기와 선언서를 압수한다. 하지만 시위대는 점점 불어나 1000여 명을 헤아렸다. 시위대가 괴산경찰서를 포위하고 연행자들의 석방을 요구했지만 일제 경찰은 진압에만 매달렸다. 성난 시위대가 돌을 던지기 시작하자 겁을 먹은 일제 경찰은 충주에 주둔한 수비대와 인근 경찰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김근수, ‘충북 최초의 괴산 항일 만세운동’) 시위대는 결국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 등에 의해 오후 10시경 해산 당했지만 여러 집단으로 나뉘어 시위를 이어갔다. 오후 5시에 시작된 시위는 이튿날 오전 2시까지 계속됐다.
괴산 장터의 시위는 충북 최초의 만세운동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3월 1일과 7일에 청주지역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됐다는 기록이 있지만 근거 자료가 명확하지 않다. 판결문 등 문서 등을 통해 고증된 충북의 첫 대규모 만세운동은 괴산 장터 만세운동이라는 게 정설이다.
○ 조직적 만세운동의 동력이 된 ‘통문’
괴산읍의 만세운동은 19일 하루로 그치지 않고 세 차례 더 이어졌다. 우선 닷새 뒤인 24일에도 시위가 펼쳐졌다. 이날의 만세운동은 홍명희의 동생 홍성희가 주도했다. 그는 괴산면 서기 구창회, 소수면 서기 김인수 등과 시위를 주도했다.
오대륙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은 “일제 식민통치의 허상을 통감하고 민족운동에 나선 면 서기가 동참한 것은 괴산 만세운동의 중요 특징 중 하나”라고 소개했다. 실제로 이날 펼쳐진 괴산 장터 만세운동에서 면 서기 구창회와 김인수의 활약상은 두드러졌다. 오후 6시경 홍성희와 구창회는 시장에 집결한 700여 명의 군중에게 나서 독립만세를 외치도록 이끌었다. 이 자리에 김인수도 함께했다. 김인수는 앞선 3월 19일 시위 때에도 만세를 외치다 붙잡혔다가 훈계 방면된 상태였다. 현장에서 홍성희가 경찰에 체포되자 김인수는 모자를 휘두르며 군중을 독려해 만세를 외치도록 했다. 시위대들은 괴산경찰서와 괴산우편국, 괴산군청 등지로 이동하면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음성시장의 상인이었던 민광식도 괴산 장터 만세운동에 합류했다. 괴산 수진교에 서있던 민광식은 시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우리 동포가 경찰에 체포됐는데도 집에 돌아가는가? 시장에 돌아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눈물로 읍소했다. 수진교에는 현재 괴산만세운동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다음 장날인 29일에도 괴산 장터에선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오후 6시경 집결한 시위대 1500여 명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경은 군인 15명과 함께 무력으로 이들을 해산시켰다. 닷새 뒤인 4월 4일에도 200여 명의 시위대가 모여 읍내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괴산군 장연면의 만세운동도 주목할 만하다. 장연면의 시위는 형제가 주도한 데다 ‘통문’이라는 형식을 통해 전개됐다는 점에서 다른 만세운동과 차별화된 특징을 갖는다.(오대륙, ‘괴산지역 3·1운동의 전개와 의의’)
장연면 오가리에 살던 김의현과 김의대 형제는 마을에 서당을 열고 인재를 양성하던 중 고종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김의대는 국장에 참석하기 위해 제자 박영래와 함께 상경했다가 3·1운동 현장을 목격하고 귀향한다. 김의대는 형 김의현과 함께 뜻을 함께할 사람들을 규합한 뒤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선언서와 태극기 수백 장을 준비했다. 거사 날짜는 4월 1일로 정해졌다. 태극기와 선언문을 각 동리에 나누는 일을 맡은 박영래는 야간을 틈타 임무를 수행했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3·1운동사’에는 장연면의 만세운동이 매우 상세하게 묘사돼 있다. “약속한 4월 1일 오가리 면사무소 앞 광장에 각 동리에서 수백 명이 모였다. 정오를 기하여 김의현은 선두에 서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김의대는 태극기를 휘날리며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모여든 군중이 이구동성으로 부르짖는 독립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이날 시위를 마치고 모인 주도자들은 다음 날인 2일 다시 거사를 벌이기로 한다. 이들은 통문(通文)을 작성해 인근 이장들에게 배포하고 주민들의 만세운동 참여를 호소했다. “4월 2일 밤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독립만세를 외치자”는 내용이었다. 통문에는 참여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차례로 적혀 있었기에 호소력이 컸다. 이에 호응한 주민 200여 명이 4월 2일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거사 당일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를 외치고 면사무소를 공격해 건물을 부수고 서류를 파기했다.(‘3·1운동사’)
오 연구원은 “괴산 만세 시위는 모두 15차례에 걸쳐 전개됐으며 이 중 주재소 등 관공서를 공격한 사례는 모두 7차례나 됐다”며 “이 과정에서 경찰관의 발포로 7명이 순국했고 8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2명은 재판 과정에서 악형과 고문을 받아 후유증으로 사망했을 정도로 만세운동이 치열하고 격렬하게 전개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특히 통문을 통해 시위가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전개됐다”면서 “전국적으로 전개된 만세운동 중 보기 드문 사례”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 농민-학생 독립염원으로 탄생한 ‘괴산청년회’ ▼
본보, 1920년 8월 창립총회 소개… 풍속개량-구호작업 등 잇달아 보도
충북 괴산지역에서 펼쳐진 만세운동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20, 30대 농민과 학생층이 주도했다는 점이다. 전국 다른 지역의 만세운동에서보다 20, 30대의 참여율이 높았고 지역 각 면 단위의 시위대에 청년층이 비교적 고르게 분포돼 있었다.(오대륙, ‘괴산지역 3·1운동의 전개와 의의’)
이는 이후 진행된 괴산지역의 농민운동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계몽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괴산군 연풍면 만세 시위에 참여한 조세기가 대표적으로 그는 1920년대 괴산지역 농민운동을 주도했다.
1920년 8월 세워진 괴산청년회도 빼놓을 수 없다. 그해 동아일보 8월 18일자에는 괴산청년회의 창립을 소개하는 기사가 게재됐다. 유문규 송종태 등 청년 10여 명이 읍내 교회에 모여 창립총회를 개최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어 한 달 뒤인 9월 18일자에는 “공립보통학교에 노동야학을 개시하고 수업자에 대한 일체 학비까지 부담하기로 한 바 응모자가 이백 명에 달하야…”라는 내용이 실리기도 했다.
괴산청년회는 이 밖에도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한 교육 터전으로서 괴산보성의숙을 설립하고 노동야학과 여성야학을 진행했다. 또 풍속 개량을 추진하고 미신을 타파하기 위해 연극 공연과 순회강연을 개최하기도 했다. 금주·금연운동을 펼쳤고 1926년 수재가 발생했을 때에는 이재민 구호작업에 적극 나서기도 했다. 이처럼 괴산청년회의 다양한 활약상은 1920년대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지속적으로 소개됐다. 괴산지역의 3·1운동에서 보여줬던 당시 청년들의 독립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이후에도 계속됐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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