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골레토의 절규와 함께 조명이 꺼졌다. 시선은 자연히 상공으로 향했다.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관한다고 믿어져온 별들이 밤하늘에 반짝였다. 갈채가 쏟아졌다. 무대가 깜깜해진 것 말고도 시선이 하늘로 향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17일 개막한 오스트리아 브레겐츠 페스티벌의 베르디 ‘리골레토’는 하늘까지 포함해 관객의 시선이 닿는 공간을 가장 ‘넓게’ 활용한 무대였다.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3개국이 만나는 보덴호수 동쪽의 브레겐츠 호반을 무대로 1946년부터 해마다 여름 야외 오페라 공연이 펼쳐진다. 1985년부터는 2년씩 같은 무대를 철거하지 않고 유지해, 거대하고 특색 있는 무대 자체가 1년 내내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올해부터 2년간 공연하는 ‘리골레토’는 비뚤어진 권력과 애욕, 아버지의 사랑과 파국을 그린 베르디의 중기 걸작 오페라다. 23일 저녁 이 작품을 관람했다.
지난달 무대를 공개한 이 작품은 2년 전 비제의 ‘카르멘’에 비해 ‘무대가 초라해 보인다’는 오페라 팬들의 걱정을 샀다.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인 연출가 필리프 슈퇼츨은 “리골레토는 진정한 영웅이 없이 뒤틀린 영웅만 있는 심리극”이라며 무대 위 거대한 머리와 손, 다른 손에 든 기구(氣球)로 주인공들의 미묘한 감정을 표현하겠다고 밝혔다. 베르디의 역동적인 음악에 비해 정적(靜的)일 무대를 염려하는 소리가 나올 만했다. 이 호반의 여러 오페라에서 톡톡히 효과를 발휘했던 프로젝션 장치도 슈퇼츨은 전혀 쓰지 않겠다고 했다.
무대가 열리자 염려는 바로 걷히고 글자 그대로 축제가 터져 나왔다. 거대한 머리의 ‘입’은 방탕한 만토바 공작의 애욕이 펼쳐지는 공간이 됐다. 무대 왼쪽의 손은 여주인공 질다를 포함해 애욕의 희생물이 감춰지는 곳, 오른쪽 기구는 순수하지만 헛된 꿈이 펼쳐지는 상징의 역할을 하며 각기 수시로 모습을 바꾸었다. ‘꿈’을 지탱하던 끈이 잘리자 리골레토의 분노는 뒤틀린 애원과 복수가 된다.
무대 중앙의 비스듬한 원반이 2001년의 푸치니 ‘라보엠’을 연상시켰지만, 이번에는 쪼개지고 무너지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원반이었다. 끝없이 변하기는 원반 가운데의 거대한 머리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얼굴은 얼마나 변할 수 있을까. 슈퇼츨의 상상력은 관객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극이 시작될 때의 모습을 점차 잃어가는 그 머리는 인간의 계획과 온갖 작위(作爲)에 대한 무상함으로 이어졌다. 굳이 영화 ‘기생충’의 대사까지 인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날 공연 출연진 중에서는 질다 역을 노래한 러시아 소프라노 예카테리나 사도프니코바가 돋보였다. 마이크를 부착하고 증폭장치의 힘을 빌리는 이 축제에서 목소리 크기는 캐스팅에 큰 고려 조건이 아니다. 그러나 이날의 질다는 스피커를 거치지 않은 육성이 더 뚜렷하게 객석으로 전달됐다. 청순하면서 다양한 색상으로 변화하는 목소리의 질감도 일품이었다.
만토바 공작 역의 테너 파벨 발루친은 호흡 때문에 템포와 음높이가 균질하지 않은 순간들이 귀에 걸렸다. 타이틀 롤인 리골레토 역의 잉베 쇠베르그는 공명점이 약간 높으면서 윤택하고 호소력 있는 음성을 자랑했지만 문제는 마이크 믹싱이었다. 질다와의 이중창 장면들과 3막 사중창 장면에서 그의 목소리는 부자연스럽게 퍼지면서 상대 출연자의 목소리를 덮었다.
브레겐츠 페스티벌 ‘리골레토’는 만토바 공작과 질다 3명, 리골레토 4명이 번갈아 출연하며 9월 15일까지 공연한다. 2021, 2022년에는 푸치니 ‘나비부인’을 공연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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