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문한 탓에 노포(老鋪)라는 단어를 어려서부터 들어보진 못했습니다. 한자어라서 그 뜻은 쉽게 알 수 있는데, 음식평론가나 언론이 일본에서 들여와 유행시킨 말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론해 봅니다. 일본에서는 노포를 발음 그대로 ‘로호’라고도 하지만 대개는 ‘시니세’라고 말하지요. 누군가 노포라는 단어를 ‘오래가게’로 바꾸자고 하였는데 기발하긴 하지만 언중이 좋아하고 많이 쓰게 될지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과연 노포라 칭할 만한 기업이나 식당이 있을까요? 두산그룹의 모태인 ‘박승직 상점’이 가장 오래됐다는데 그래야 130년 남짓입니다. 백제의 후손이 일본에 가서 세웠다는 가장 오래된 기업은 1500년 가까이 된다니까 비교하기가 조심스럽습니다. 우리에겐 사농공상의 차별의식과 더불어 당장 ‘목구멍에 풀칠’이 우선인지라 가업을 후손에게 대대로 물려준다는 것 자체가 언감생심이었겠지요. 우리 실정에 맞는 노포 식당의 기준을 제 나름으로 말씀드리자면 2∼3대 이상이 그 업을 했고, 창업 때의 메뉴와 전통적 조리법 그리고 선대의 개업 정신을 유지하며, 서비스나 인테리어 등은 시대 조류에 맞게 계속 개선해야 합니다. 간혹 유명 노포에서 횡포에 가까운 서비스를 받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선대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일이 되겠지요.
노포 식당 중에는 백화점처럼 주인공을 여럿 내세운 곳도 있지만, 대개는 대표 메뉴 하나를 중심으로 조연 몇을 포진한 곳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몇몇 식당에서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영화로 치면 주연배우 뺨치는 ‘신스틸러’ 메뉴가 있기도 합니다. 매출도 매출이거니와 본말전도 현상까지 우려될 정도라 일일 한정 수량으로 내놓는 곳까지 있습니다.
백년가게를 지향하는 수원의 대원옥은 평양냉면 노포인데, 단골손님들은 삼겹살 수육을 먼저 주문하는 ‘선육후면’의 원칙을 지킵니다. 메밀 삶은 물로 삼겹살을 익히기에 돼지 특유의 냄새도 없고 야들야들한 식감 때문에 술안주로 그만입니다. 학동역 근처에 위치한 소문난양평해장국은 해장국과 내장탕도 유명하지만, 돼지껍데기 구이가 신스틸러 마동석 같은 존재입니다. 서소문동의 진주회관 역시 콩국수 하나로 천하를 평정한 노포인데, 여기에도 배우 유해진 같은 메뉴가 있습니다. 바로 즉석에서 볶아주는 김치볶음밥입니다. 이 정도면 주연과 조연이 헷갈리는 수준이 됩니다만, 식당도 영화처럼 완성도를 위해 조연들의 열연은 필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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