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66화> 경남 산청
‘나라 잃은 2000만 겨레의 울부짖는 만세의 외침은 기미년 3월 1일을 기해 삼천리 방방곡곡은 물론 멀리 해외까지 노도(怒濤)처럼 메아리치며 퍼져나갔다. 때를 같이하여 이곳 산청에서 봉기한 수천 군중이 3월 21일 거사해 약소민족의 설움을 세계만방에 호소했다. 왜경의 총탄 앞에 쓰러져 순국한 선열과 부상자 등의 고귀한 넋은 독립의 밑거름이 되어….’(산청 항일독립유공자추모비)
경남 산청군은 1919년 당시 서부 경남에서 만세시위가 가장 치열했던 곳들 가운데 하나였다. 3월 19일부터 사흘간 진행된 신등·단성면 시위가 특히 격렬했다. 산청군의 남쪽에 위치한 신등·단성면 시위는 유림 세력이, 북쪽의 산청읍 시위는 도쿄 유학생 등 신지식인들이 각각 독립적으로 주도했지만 일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정신적 뿌리는 같았다. 100년 전 만세시위 때 일제 군경의 집단 발포로 11명이 숨진 단성면 성내리 시장 인근 도로 옆에 추모비가 서 있다.
○ 유학자가 주도한 신등·단성 시위
산청 최초의 만세운동인 신등·단성 시위는 유학자 김영숙이 계획했다. 망국을 원통해하던 그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국내외 독립지사들과 비밀 연락을 하며 광복이 되기를 기다려왔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그러던 차에 고종 승하 소식이 들려왔다. 김영숙은 이웃에 사는 윤병모를 찾아가 3월 3일 고종 인산(因山)에 맞춰 장남들을 서울로 보내기로 했다. 이들의 아들인 김상준과 윤규현은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한 뒤 독립선언서를 구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들에게서 3·1운동 소식을 접한 김영숙은 산청에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심하고 동지들을 모았다. 3·1운동 직후 유림에서는 파리강화회의(1차 세계대전 종결을 위해 승전국들이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한 회의)에 보낼 파리장서 연명운동이 한창이었다. 하지만 김영숙의 생각은 달랐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전 민족이 의거해야 한다고 보고 연명운동 참여를 거부했다.(‘독립운동사’)
김영숙·김상준 부자(父子)의 시위 계획에 김기갑 윤치현 정태륜 등이 뜻을 같이했다. 제자들과 함께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설득했다. 수천 장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대한독립 만세’라고 적힌 큰 태극기를 준비하며 격문도 썼다. 허학수 산청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은 “신등면 평지리에 살았던 김영숙은 덕망이 높아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던 인물”이라며 “그의 말이라면 사람들이 수긍하고 따랐다고 한다”고 전했다.
준비가 끝나자 이들은 3월 19일 신등면 단계리 시장에서 첫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18일 밤 신등·단성면 주민들에게 계획을 알리고 곳곳에 격문을 붙였다. 하지만 단성면 헌병분견대 주변에 붙인 격문을 통해 시위계획을 파악한 일제 경찰들에 의해 19일 시위 출발 장소에 모여 있던 군중과 주동자 일부가 붙잡혔다. 이들은 헌병분견대로 끌려가면서도 “독립 만세”를 외쳤고, 길가에 있던 남녀노소가 같이 만세를 부르면서 뒤따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위대 규모가 커지자 일경은 총검을 휘두르며 저지했다. 검거를 피한 나머지 주동자들은 다시 모여 20일 단계리 시장과 21일 성내리 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이어가기로 했다.
○ 수천 시위대에 놀란 日軍, 회유 시도
20일 날이 밝자 단계리 장터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오후 2시경엔 그 수가 1000명을 넘어섰다. 시위대가 만세를 외치며 단성면 성내리 시장으로 이동하는 도중에도 사람들이 합세해 시위대는 3000여 명으로 불어났다.(‘경남지역 3·1독립운동사’)
이때 김영숙의 수제자인 정태륜은 “조선인이 모두 현재의 학정에 비분(悲憤)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구한국 정부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독립만세를 부르는 것이니 우리는 다 같이 끝까지 독립만세시위를 그치지 말아야 한다”며 시위를 독려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자 일제 헌병은 전날 체포한 주동자 5명을 석방한 뒤 김영숙과 정태륜에게 해산을 요청했다. 하지만 시위대는 시장과 성 주변을 행진하며 밤늦게까지 운동을 이어갔다. 이에 거창 헌병분견대원 20∼30명과 진주 일군 수비대 40∼50명이 출동해 강제 해산에 나섰다.
이튿날인 21일은 성내리 시장 장날이었다. 대규모 시위가 일어날 것을 우려한 거창 헌병분견대장은 또다시 회유를 시도했다. ‘지역 소요는 가급적 유화정책을 쓰라’는 상부 지시에 따른 조치였다. 이날 아침 분견대장은 주재소 뜰에 잡혀 있던 시위 참가자들에게 “남의 유혹에 빠져 시위에 참가한 자는 손을 들라. 그러면 집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제안했다. 이 말에 일부가 손을 들자 김상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렇게 호통쳤다.
“왜적이 우리나라에 강요해 합방조약을 맺을 때 10년 후에 독립권을 반환한다 하더니 이 맹약을 위배하고 오히려 고종 황제를 독살하였으니 우리의 불공대천지원수(不共戴天之怨讎·하늘을 함께 이지 못하는 원수)라. 그런데 제군은 그 원수에게 애걸하니 어찌 그렇게도 비겁한가!”
○ 주재소 앞 집단 발포로 11명 순국
21일 아침부터 성내리 장터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일제 군경은 주민들에게 시위에 참여하지 말라고 경고한 뒤 주재소와 면사무소, 보통학교 등으로 통하는 도로 입구에서 총에 칼을 꽂은 채 경계에 들어갔다. 오후 1시경 장터에 모인 1000여 명의 시위대는 ‘독립 만세’라는 글자가 적힌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을 시작했다. 일제 헌병들이 시위대를 향해 공포탄을 쐈지만 만세 함성은 더 커졌다. 일부 시위대는 보통학교 삼거리에서 시위대를 저지하던 일제 헌병들의 총기를 빼앗기도 했다.
시위대가 주재소에 도착하자 일제 군경은 맨 앞에 서있던 김영숙 정태륜 등 주동자 6명을 체포했다. 이후 석방 교섭이 시작됐다. 일제 측은 군중이 해산하면 주동자들을 석방하겠다고 주장했고 시위대는 먼저 석방하면 해산하겠다고 맞섰다.
교섭이 무산된 가운데 시위대의 규모는 더 커졌다. 오후 3시경 시위대 일부가 몽둥이를 휘두르고 돌을 던지면서 일제 군경이 쳐놓은 경계선 돌파를 시도했다.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주재소로 접근하던 시위대를 향한 일제의 조준 사격이 시작됐다. 신등·단성 시위로 인해 11명이 숨졌고 24명은 재판에 넘겨졌다.
○ 결사대가 주도하고 농민이 이어받은 산청읍 시위
신등·단성 시위 주동자들이 시위 동참을 촉구하는 격문을 거리 곳곳에 붙이던 3월 18일, 산청읍에선 독립운동을 위해 생사를 같이할 것을 맹세한 결사대가 조직됐다.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난 뒤 독립선언서를 구두 밑창에 숨겨 고향에 돌아온 도쿄 유학생 오명진이 주동이 됐다. 오명진 민영길 신영희 오원탁 최오룡 신창훈 신몽상 등은 이날 오후 5시경 숲이 우거져 감시를 피하기 쉬운 경호강 옆 수계정(현 산청공원)에서 비밀 회합을 갖고 결의문을 채택했다.
“군국주의를 타파하고 불완전한 세계의 조직을 개조해 정의 인도에 기반한 새 세계를 조직하기 위해 미국 대통령 윌슨이 14개조를 선언해 파리강화회의에 제안했던 바…(중략)…한민족도 이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
결사대는 22일 산청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역할을 나눠 시위를 준비했다. 신창훈과 신몽상은 읍사무소 등사판을 신영희 집으로 가져가 독립선언서와 결의서, 태극기 2000여 장을 등사했다. 나머지는 시위에 참가할 군중을 규합했다.
결사대는 군 전체에서 만세시위를 보다 효과적으로 할 생각으로 군수까지 포섭하기로 했다. 홍승균 군수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했으나 그는 곧바로 이들을 헌병분견대장에게 고발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격이었다. 거사 하루 전인 21일 오전 1시 일제 헌병들이 신영희의 집에 들이닥쳐 독립선언서 등을 압수했고, 결사대원 전원이 붙잡혔다.
주동자들이 검거됐지만 거사일인 22일 산청읍 장터에선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정오 무렵 수백 명이 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었다. 일제 헌병대와 수비대가 출동해 총검을 휘두르며 강제 해산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큰 태극기를 들고 시위대를 이끌던 민치방이 총검에 찔려 한쪽 팔이 평생 불구가 됐고, 박응양은 일본군이 휘두른 칼에 맞아 오른쪽 귀와 팔이 절단되는 피해를 입었다.(‘독립운동사’) 허학수 소장은 “산청읍 의거는 군수의 밀고로 좌절될 뻔했으나 애국심이 불타오른 농민들이 궐기하면서 이뤄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 파리에 보낼 ‘독립청원서’ 한줄씩 잘라내 짚신 날에 감춰 ▼
곽종석, 2674자 ‘파리장서’ 작성 주도
체포돼 2년 구형받자 “왜 종신 아니냐”
산청군에서 3·1운동으로 가장 높은 등급의 건국훈장을 받은 사람은 면우 곽종석 선생(1846∼1919·독립장)이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에 한 명도 이름을 올리지 못한 유림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 소식을 듣고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에 우리의 독립 의지를 알리기 위해 2674자의 ‘파리장서’를 제출했다. 유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으로 평가받는 파리장서 작성을 주도하고, 여기에 연서한 137명의 유림 중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린 이가 곽종석이다. 일제가 ‘한국이 독립을 원치 않는다’는 내용의 문서에 거짓 유림 대표의 서명을 받아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자 이를 반박하기 위해 보낸 것이었다.
11일 찾아간 단성면 남사예담촌에는 면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유림독립운동기념관’은 파리장서사건 당시 한국 유림 대표였던 그가 산청에서 출생한 것을 기념해 2013년에 건립됐다. 곽종석의 일생뿐만 아니라 유림의 독립운동 전반을 소개하는 공간이다. 파리장서를 갖고 중국 상하이로 떠나는 제자 김창숙이 일제의 검문에 걸리지 않도록 곽종석이 파리장서를 한 줄씩 잘라내 노끈을 비벼서 짚신 날에 감춘 일화를 보여주는 인형들이 눈에 띄었다. 기념관 옆에는 곽종석의 제자들이 1920년 그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이동서당이 있다.
파리장서는 1919년 3월 파리에 한국 대표로 파견됐던 김규식에게 보내졌고, 국내 향교들에도 전달됐다. 일제는 김창숙이 중국으로 떠난 직후 만세시위 주동자를 붙잡아 조사하는 과정에서 파리장서의 존재를 알게 됐다. 한국 유림 대표였던 곽종석은 거창에서 체포돼 대구 감옥에 수감됐다. 재판 과정에서 일제 검사가 징역 2년을 구형하자 곽종석은 “어찌 종신이라고 하지 않고 하필 2년이냐. 내가 여기에 오면서 본래 살아서 돌아가는 것을 기약하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맞섰다.(‘파리장서와 유림의 독립운동’)
산청군은 3·1운동 100주년이자 파리장서운동 100주년을 맞아 남사예담촌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관광자원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생가 터 바로 앞의 밭을 매입해 생가를 복원하는 공사를 올해 안에 시작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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