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외 작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 최초의 세계문학상인 ‘박경리문학상’이 올해로 9회를 맞는다. 이 상은 보편적 인간애를 구현한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1926∼2008)의 문학 정신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11년 제정됐다. 토지문화재단(이사장 김영주)과 박경리문학상위원회, 강원도와 원주시, 동아일보사가 공동 주최한다. 상금은 1억 원, 초대 수상자는 ‘광장’의 최인훈 작가였다. 이어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러시아), 메릴린 로빈슨(미국), 베른하르트 슐링크(독일), 아모스 오즈(이스라엘), 응구기 와 시옹오(케냐), 앤토니아 수전 바이엇(영국), 리처드 포드(미국) 순으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올해 박경리문학상 심사위원회(위원장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는 최근 최종 후보 5명을 결정했다. 수상자는 9월 19일 발표할 예정이다. 최종 후보 가운데 첫 번째로 스페인 소설가 안토니오 무뇨스 몰리나(63)를 소개한다. 문학평론가이자 서울대 명예교수인 김성곤 심사위원이 그의 작품 세계를 분석했다. 》
안토니오 무뇨스 몰리나의 문학세계를 관통하는 주제는 ‘개인의 삶과 사랑과 죽음에 역사가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이다. 개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사랑과 죽음일 것이다. 사랑과 죽음은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고, 이 환경은 태어난 나라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몰리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삶과 사랑과 죽음은 모두 격동기 스페인의 역사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렘브란트의 명화에서 제목을 빌려온 그의 대표작 ‘폴란드 기병’(1991년·사진)은 중년에 접어든 주인공 마누엘이 18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4대에 걸친 가족사와 인생 여정을 스페인의 역사에 비추어 회상하는 내용이다. 스페인이 1898년 쿠바 독립 전쟁에서 패전해 빈국으로 전락한 뒤 내란, 군부독재, 민주화를 맞는 과정이 추리, 역사, 성장, 모험, 마술적 리얼리즘의 기법으로 펼쳐진다.
마누엘의 증조부는 스페인의 몰락을 초래한 쿠바전쟁에 참전했고, 조부는 정치 이데올로기 싸움이었던 내란에 참전했다. 마누엘의 부친은 스페인 내란 후에 닥친 군부독재와 가난을 견뎌내야 했던 전후세대를 대표한다. 마누엘 자신은 프랑코 사후에 일어난 민주화 운동과 사회적 혼란을 겪는 젊은 세대를 상징한다.
소설 속 스페인의 상황은 한국 독자들에게 짙은 호소력을 갖는다. 한국도 군부독재를 견디며 경제 발전을 이룬 노년 세대와 민주화 이후 혼란을 겪는 젊은 세대가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크 사후에 경제가 피폐해지자 프랑코 시대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생겨난 것도 요즘 한국 상황과 비슷해 보인다.
역사적인 무거움을 감동적인 러브 스토리로 담아낸 점도 눈에 띈다. 마누엘과 나디아의 짧은 사랑과 이별, 훗날 마드리드에서의 재회, 이름을 바꾸고 다른 사람처럼 변한 나디아를 알아보지 못하는 마누엘의 이야기는 당시 혼란스러웠던 스페인 사회를 은유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현대 스페인 문학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프랑코의 독재시대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사람들은 프랑코 사후에 정치 보복 금지법을 만들어서 정치 보복의 악순환을 끊었다. 프랑코 정권을 위해 일했던 공무원은 단 한 사람도 처벌받지 않았다.
이 작품 역시 과거에 대한 분노와 증오보다는 그러한 상황에 처한 개인의 삶과 운명을 심도 있는 역사 인식으로 성찰했다. 그런 의미에서 독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주인공 마누엘이 각기 다른 언어를 연결해주는 통역사라는 점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 안토니오 무뇨스 몰리나는…
1956년 스페인 안달루시아에서 태어나 그라나다대에서 역사를, 마드리드대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다. 독특한 서술기법과 탈모더니즘·탈리얼리즘적 역사관으로 스 페인의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 즘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스페인의 보르헤스 또는 스페인의 마르케스로도 불린다.
‘리스본의 겨울’(1987년)로 스페인 내셔널 내러티브상을, ‘폴란드 기병’으로 플라네타상과 두 번째 스페인 내셔널 내러티브상을 받았다. 2013년에는 프린스 오브 아스투리아스상을 수상했다. 1995년에는 39세의 젊은 나이에 스페인 왕립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임명되며 전후 스페인 최고의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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