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통합을 위해 힘썼던 프랑스 여성 정치인 시몬 베유가 2017년 90세로 세상을 떠나고 1년 뒤. 국민의 청원으로 그녀는 프랑스 파리 판테옹에 묻혔다. 판테옹은 프랑스를 빛낸 위인들을 안치하는 국립묘지이자 성전이다. 베유가 안장되던 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는 당신과 당신의 투쟁을 사랑한다. 당신의 역할은 끝나지 않았다. 당신의 싸움이 우리 혈관에 계속해서 흐르길 바란다.”
마크롱의 말처럼 베유의 삶은 지금 같은 때 세계인에게 더 많은 울림을 준다. 경제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고 관용의 폭이 줄고 있으며, 차별과 폭력을 조장하는 국가주의의 망령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이 지금이기 때문이다.
이 자서전에서 베유는 자신의 삶을 시작부터 담담하게 써내려간다. 1927년 프랑스 니스에서 유대인 건축가의 딸로 태어난 베유는 17세에 아우슈비츠에 수용됐다. 여러 명을 단체로 끌고 가 벌거벗긴 채 물과 소독약을 끼얹고, 낙인을 찍는 행태를 생생하게 기록했다. 특정 민족에 대한 증오가 만든 인간의 비이성적 행위가 자아내는 끔찍함은 이 시대의 많은 이가 경계해야 할 모습이다.
전쟁이 끝나고도 베유는 끔찍한 말을 견뎌야 했다. 그녀의 팔뚝에 낙인찍힌 번호를 보고 “사물함 번호냐”고 농담을 한 사람 때문에 한동안 긴 소매 옷만 입고 다니기도 했다. 수용소에 끌려갔다 살아남은 사람들 대부분은 스스로 이야기를 하는 것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꺼리지만 베유는 고통을 다시 대면했다.
그는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증언한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특히 1947년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가 나왔을 때는 “어떻게 이런 책을 빨리 쓸 수 있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프리모 레비는 즉각적으로 완전한 명료함에 다다랐지만 이 명료함이 그를 자살로 몰고 갔다는 점에서 비극적이었다”고 돌아본다.
7만8000여 명의 프랑스계 유대인 중 2500명만이 살아남았다. 베유도 가족을 잃었고, 그곳의 화장터에서 풍기던 악취와 연기, 끔찍한 기억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녀의 담담한 증언 속에서 드러나는 건 그가 처절한 고통을 가슴에 품고, 그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용감하게 맞섰다는 사실이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영향으로 ‘여성도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교정 행정국의 판사가 된다. 실제 강제수용을 겪었기에 “인간사에서 타인의 존재를 모욕하고 격하시키는 모든 것에 극도로 민감해진” 그녀는 수감자의 처우 개선을 위해 발로 뛴다. 또 481명의 남성 의원이 둘러싼 의회장에서 임신 중단 합법화를 요청하고, 보건부 장관으로서 관련법을 통과시킨다. ‘20세기의 목격자’이자 프랑스에서 가장 존경받는 정치인인 그녀의 삶은 고통이 피워낸 아름다움 그 자체임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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