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 패망사: 태평양 전쟁 1936∼1945/존 톨런드 지음·박병화, 이두영 옮김/1400쪽·5만8000원·글항아리
◇책임에 대하여/서경식, 다카하시 데쓰야 지음·한승동 옮김/320쪽·1만8000원·돌베개
‘일본 제국 패망사’는 머리말부터 아찔하다. “우리가 타일러 데닛(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밝힌 미국의 외교사가)의 말대로만 했다면, 1941년 미국과 일본의 협상은 전쟁 대신 평화롭게 마무리됐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저자의 이런 가정대로 됐더라면, 그러니까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지 않고 태평양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중일전쟁은 2차대전과 별개의 전쟁이 됐을 것이며 일제는 나중에 만주를 잃지 않는 정도에서 중국과 강화를 했을 수도 있다. 물론 ‘김 씨’는 여전히 ‘가네모토(金本) 상’으로 불렸을지도 모른다.
미국의 저명 전쟁사학자가 태평양전쟁의 전사(前史)인 1931년 만주사변부터 태평양전쟁의 개전과 양상, 일본의 항복까지를 다룬 논픽션이다. 1972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방대한 자료와 인터뷰, 취재를 바탕으로 써서 치밀하고 흥미롭다. 앞부분 1936년 황도파(皇道派·일본군 내 일왕 절대주의 급진파) 장교들의 ‘2·26 쿠데타’ 서술부터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박진감이 넘친다. 실패한 이 쿠데타는 오히려 군부가 정치를 더 좌지우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1941년 개전 직전 나가노 해군 군령부 총장은 쇼와 일왕을 만나 일본의 석유 비축량은 2년분이며, 전쟁이 나면 18개월밖에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도 “어떤 상황에서든 선수를 쳐야 한다”고 말했다. 일왕은 말했다. “전쟁은 절망적이겠군.” 일본은 어째서 제 무덤을 판 이 전쟁으로 달려갔는가. 책은 팽팽하던 전쟁파와 외교파가 일왕에게 책임을 떠넘기면서 종교적 광신에 휩싸이는 과정을 도쿄의 권력 최상층부에 현미경을 들이대며 보여준다.
이 책의 번역 출간은 때늦은 감이 있다. 출판사 측에 따르면 “시중에 태평양전쟁 전반을 다룬 통사는 단 한 권도 없다.” 한국의 해방을 직접 가져온 것이 미군의 태평양전쟁 승전인데도 우리는 주로 중국을 무대로 벌어진 무장투쟁이나 의열투쟁에만 큰 관심을 갖는 경향이 없지 않다. 책 서두에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다리를 다쳤던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대신이 항복문서에 서명하기 위해 지팡이를 짚고 미주리호에 오른 사진은 그만큼 상징적이다.
제목만 보고 최근 한일 갈등 국면에서 ‘심리적 위안’이 될 책이라고 믿는다면 오해다. 저자의 시선은 ‘일본이 이래서 망했다’는 것보다는 무모했지만 강력했던 적을 이해하려는 데 가깝다. 1970년 첫 출간 당시 원제는 ‘The Rising Sun: The Decline and Fall of Japanese Empire’.
에필로그는 패전 몇 달 뒤 황궁과 맥아더 사령부에 번갈아 절을 하는 한 나무꾼의 행동으로 마무리한다. 저자는 말한다. “그는 길 건너편에 있는 영원한 존재(일왕)를 숭배하면서 지금의 쇼군(맥아더 장군)이 가진 일시적인 권력을 솔직하게 받아들였다.”
이처럼 일왕과 천황제도에 전쟁의 책임을 묻지 않은 종전은 일본이 제대로 된 반성 없이 전후 체제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다수 일본인에게 종전은 강자 미국을 받아들이는 문제였지 반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책임에 대하여’가 다루는 주제로 이어진다.
‘책임에…’는 자이니치(在日·재일) 조선인 2세로 일본의 우경화와 국민주의의 위험성을 비판해 온 서경식 도쿄게이자이대 교수와, 일본의 역사왜곡과 인권 문제를 지적해 온 비판적 지식인인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대학원 교수의 대담집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오키나와 미군기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천황제의 모순 등을 다루면서 현대 일본이 퇴행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다카하시 교수는 일본의 현재를 상징하는 천황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천황제가 전쟁 전과 전쟁 중에 야기한 참화에 대해 아키히토 (전) 일왕 자신도, 일본 정부도 공식적으로 반성의 뜻을 표한 적이 없다. 일왕 개인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천황제”라며 “반민주주의적 사상이 일본의 정치 속에 뿌리 깊이 남은 것도 천황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서 교수는 “천황제는 근대 일본의 몬스터 같은 제도로, 실체 없는 유령 같은 것을 설정해 놓고 대립을 조정하며, 그 결과를 지배층의 이익으로 회수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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