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을 목전에 둔 1999년 한 대학 캠퍼스. ‘힙’과 ‘쿨’의 대명사 노마 선배와 어떤 상황에서도 심드렁한 국화가 체스판을 두고 마주한다. ‘나’가 선망하는 노마 선배에게 국화는 직구를 툭툭 던진다. 그런 국화에게 선배는 이상하게도 영 힘을 못 쓴다.(‘체스의 모든 것’)
야심 차게 1인 출판사를 차린 나. 빛과 소금 같은 인문·교양 지식을 세상에 전하고 싶었으나 현실은 파산. ‘곰의 자서전’ 같은 재고 서적은 결국 잘나가는 닭갈비집 사장인 장인의 냉동 창고에 잠자는 신세가 된다. 나는 장인과 아내의 은근한 멸시 속에 열패감에 빠진다.(‘오직 한 사람의 차지’)
때론 굴욕의 속편이 더 큰 괴로움을 안긴다. 왜 잠자코 참았을까. 반격하지 못했나. 굴욕의 순간이 초 단위로 무한 증식해 구정물 같은 수치와 모욕을 던진다. 소설가 김금희가 2015년 이후 써내려간 작품 9편을 묶어 세 번째 단편집을 냈다. 올해로 등단 10년 차를 맞은 그는 최근 인터넷 서점 예스24 독자들이 뽑은 ‘한국 문학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에 뽑혔다.
책에는 저마다의 과거에 붙들린 인물이 등장한다. 책에 대해 작가는 “전작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작업했다. 계속 플롯을 짜는 방식이 아니라, 긴 호흡으로 인물들이 지나온 상처에 집중하려 했다”고 했다
고유한 상처들은 무시로 튀어나와 일상을 지배한다. 해외 농장에서 일할 때였다. 노마 선배는 저지르지 않은 잘못을 고백하고선 모욕감을 느낀다. 이후 “그런 기억에서 자신을 구하고 싶었지만 동시에 벌주고 싶었고 그렇게 벌주고 싶으니까 종종 스스로 학대한다”. 훗날 재회한 노마 선배와 국화는 실패자의 감각을 공유하면서, 한때의 열띤 체스 토론을 회상한다.
‘문상’의 송은 조모의 죽음을 슬퍼하는 어린 자신의 뺨을 몇 번이고 갈긴 아버지로 인해 “어떤 대상과 가까워질 때마다 드는 복잡한 결의 불편함”을 지니고 산다. 과거는 “환각처럼 짜고 물큰한 오래오래 달여진 국물음식의 냄새”처럼 떨치기 힘들다. 송은 문상길에서 희극배우와 대화를 나누면서 상처와 화해한다.
‘새 보러 간다’에서는 지위 차를 들여다본다. 원로 예술가 현석경의 작품을 비평하는 윤. 꿈에 그리던 작가를 직접 만나 작품의 무수한 특징과 암시, 자기만 알아낼 수 있었던 반복과 패턴, 의미 등을 열렬히 설명하지만, 현석경은 그저 침묵만으로 윤을 압도한다. “참으로 냉정한 오리지널리티였다.”
사랑으로 인한 동요를 그린 작품도 아름답다. ‘레이디’는 투명한 만큼 스러지기 쉬운 여중생들의 사랑을 그렸다. ‘누구 친구의 류’는 십수 년 만에 재회했다 다시 헤어지는 첫사랑 이야기다.
상처에 휘청거리면서도 작품 속 인물들은 앞으로 나아간다. “마치 동면을 지속해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던 시절은 다 잊은 봄날의 곰처럼, 아니면 우리가 완전히 차지할 수 있는 것이란 오직 상실뿐이라는 것을 일찍이 알아버린 세상의 흔한 아이들처럼.”(‘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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