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소설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를 읽고선 유경은 긴 생각에 잠긴다. 그는 스스로 괜찮게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다소 냉소적이지만 지적이고 온화한 성격에 책임감도 남달랐다. 한데 40년 지기 희진의 눈에 비친 과거의 자신은 형편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세 번째 공주였다. … 그 상황에서 왜 비련의 여주인공을 흉내 내며 제풀에 도망을 치는 것일까. … 회피야말로 가장 비겁한 악이다. 애매함과 유보와 방관은 전 세계 소통에 폐를 끼친다.”
소설가 은희경(60)은 숙명여대 기숙사에서 보낸 시절을 흑역사로 기억한다. 스무 살 은희경은 미숙하고 소심해서 “쉴드를 쳐주기 힘들 만큼 엉망”이었다. 한 번은 짚어야 할 이야기인데 아무리 애써도 의미가 잡히지 않았다. 가슴앓이로 어느 날 울음이 터졌고, 그 순간 빛줄기가 스쳤다. 답은 현재와 과거의 관계에 있었다.
신작 장편 ‘빛의 과거’를 펴낸 그를 5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이 이야기가 그래서 왜?’라는 고민과 씨름하다가 몇 년 전 여성주의 물결에서 답을 찾았다. 과거의 내가 제대로 싸우지 않아서 현재로 문제가 이어진 게 아닌가 싶었다. 이 소설은 기성세대의 반성문”이라고 했다.
“자기변명이나 미화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과거를 바라보면 현재의 좌표를 제대로 읽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희진의 서늘한 시선을 빌려 유경이 과거를 다시금 되짚길 바랐습니다.”
유경과 희진 외에 소설에는 다양한 인물이 나온다. 학생운동에 적극적인 최성옥, 남을 교정하면서 우월감을 느끼는 곽주아, 혼자 있길 즐기는 책벌레 오현수, 허영심 강한 연애박사 양애란, 예쁜데 걸걸한 송선미 등이다. 긴급조치 9호 시절이었던 시대상을 세밀하게 복원하기 위해 건축물을 쌓듯 정교하게 캐릭터를 직조했다.
“인물마다 사회와 부딪히는 접점을 만들어 시절을 드러냈어요. 오현수는 집단의 틀에 침범당하는 개인성, 최성옥은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 김희진은 여성에 대한 편견에 각각 맞서죠. 현재로 이어지는 당대의 문제들을 인물을 통해 제시했습니다.”
청춘을 반성하는 마음으로 썼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젊은 독자들이 기성세대의 비애를 들여다봐 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그는 “세상이 각박해지니 상대를 쉽게 속단하게 된다.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기성세대가 어떤 꿈을 꾸고 좌절해 왔는지를 그렸다. 문학으로 화해의 장을 열고 싶다”고 했다.
그는 요즘 20년 만에 이사 간 아파트 독서실에서 글을 쓴다. 10대, 20대가 주로 머무르는 공간이지만 나이는 의식하지 않는다. 나이뿐 아니라 그 어떤 틀에도 스스로를 가두지 않는다. 그는 “카페에선 손님, 외국에선 이방인, 길에선 걷는 사람이다. 다양한 나로서 살아야 계속 쓸 수 있다”고 했다.
“읽고 쓰는 인생이 아니었다면 이기적이고 소심한 스무 살 무렵의 은희경으로 남았을 거예요. 소설 덕분에 타인과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었죠. 새벽에 책장에 햇빛이 비쳐 드는 걸 보면, 깨치고 표현하면서 산 지난 세월이 형편없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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