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왕비 마리 역 2번째 열연 남편 손준호와 이번 작품도 호흡 “나 보고 왕비병 걸렸냐고 하더라”
김소현의 재발견, 아니 대발견이다.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를 보면서 5년 전 초연의 기억이 A4 용지 위에 떨군 파란 잉크처럼 스멀스멀 번져 올라왔다.
김소현은 프랑스의 왕비였으나 18세기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단두대에서 생을 마쳐야 했던 비운의 여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맡고 있다. 2014년 초연에 이어 두 번째다.
1막의 김소현과 2막의 김소현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 영리한 배우는 자신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눈을 객석에 앉혀 놓은 것처럼 연기하고 노래했다. 김소현은 “연기의 기술이 없어 그냥 실제라고 생각하며 하루하루 몸을 던지고 있을 뿐”이라고 했지만 믿기 어렵다.
특히 2막 후반, 오열하고 절규하고 좌절하는 김소현의 연기는 반드시 봐 두어야 할 텍스트. 그 기품 있는 좌절을 그가 아니면 누가 또 보여줄 수 있을까.
클래식 음악계에 ‘바흐 스페셜리스트’, ‘베토벤 스페셜리스트’, ‘말러 스페셜리스트’가 있다면 김소현은 ‘황후 스페셜리스트’로 불릴 말한다.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마주한 김소현은 연신 “부끄럽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2013년에 엘리자벳을 시작으로 마리 앙투아네트, 명성황후를 연달아 두 번씩 했어요. 그러다보니 그런 이미지가 생긴 듯한데, 부끄러울 뿐입니다. 집에 계신 ‘가족’도 저한테 왕비병 걸렸냐고 하더라고요.”
김소현이 말한 ‘가족’은 남편인 손준호 배우다. 손준호는 몇몇 작품에서 이미 김소현과 부부 혹은 연인으로 호흡을 맞춘 적이 있는데, 이번 작품에서도 마리 앙투아네트의 연인인 페르젠 백작 역이다.
“부부케미가 절정에 달했다는 얘기가 들린다”고 하니 김소현이 크게 웃었다. “아무래도 실제 부부라고 생각하고 봐 주시니까 그런 게 아닐까요. 손을 한 번 잡아도 그렇고. 그런데 손준호씨뿐만 아니라 다른 페르젠들하고도 케미가 좋습니다(웃음).” 이번 시즌에서 페르젠 백작은 손준호 외에도 박강현, 정택운(빅스), 황민현(뉴이스트)이 맡고 있다.
“엘리자벳, 명성황후, 마리 앙투아네트 모두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죠.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중에서도 불행의 종합선물세트 같아요. 화려한 왕족으로 태어나 천진난만하고 밝은 인물이었지만 감옥에 갇히고, 남편(루이16세)이 죽고, 아들을 뺐기죠. 국민들로부터 지탄을 받아야 했고 수레에 실려가 너무도 끔찍한 단두대에서 이슬로 생을 마칩니다. 쉬지 않고 순차적으로 불행을 겪어야 하는 마리의 연기가 너무 힘들어요.”
김소현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감춰졌던 인간적인 면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다. 실제로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연구들은 지금까지 알려진 얘기들이 상당 부분 왜곡돼 있음을 밝혀내고 있다. 예를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빵이 없으면 케이크 먹으면 되지”라는 말을 마리 앙투아네트는 한 적이 없다(극 중에서는 궁중 의상디자이너의 대사로 나온다). 사치와 과소비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재위 중 사용한 예산은 공식적으로 책정된 왕실예산의 10%에 불과했다고 한다. 실제로는 마리 앙투아네트 선대의 왕비들이 훨씬 더 많은 돈을 썼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화려한 무대와 조명, 의상(마리의 경우 13벌의 옷과 8번의 가발 체인지를 한다)도 풍성한 볼거리를 선사하지만 역시 작곡가 실베스터 르베이의 넘버들이 최고다. 마리와 마그리드 아르노가 격돌하는 ‘증오 가득한 눈’은 얼려두고 조금씩 깨물어 듣고 싶은 명넘버. “워낙 복합적으로 감정이 교차해 전체 장면 중 가장 표현하기 힘든 넘버”라고 김소현이 털어놓은 ‘최고의 여자’도 마리 앙투아네트의 잊을 수 없는 솔로곡이다. 11월 17일까지 서울 신도림 디큐브아트센터에서 공연. 다른 뮤지컬과 달리 미리 역사적 배경을 슥 읽어보고 가면 재미와 감동이 훨씬 더 깊어진다. 내 얘기가 아니고, 김소현의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