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모르는 당신의 추억이 내 추억을 일으켜 세우다니…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27일 17시 15분


기차표 운동화 / 안현미(1972~)

원주시민회관서 은행원에게

시집가던 날 언니는

스무 해 정성스레 가꾸던 뒤란 꽃밭의

다알리아처럼 눈이 부시게 고왔지요

서울로 돈 벌러 간 엄마 대신

초등학교 입학식 날 함께 갔던 언니는

시민회관 창틀에 매달려 눈물을 떨구던 내게

가을 운동회 날 꼭 오마고 약속했지만

단풍이 흐드러지고 청군 백군 깃발이 휘날려도

끝내, 다녀가지 못하고

인편에 보내준 기차표 운동화만

먼지를 뒤집어쓴 채 토닥토닥

집으로 돌아온 가을 운동회날

언니 따라 시집가버린

뒤란 꽃밭엔

금방 울음을 토할 것 같은

고추들만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지요



시는 많은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좋아하던 것이었다. 그래서 시에 대한 이론을 만들려는 시도도 많았다. 그러나 ‘시는 무엇이다!’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았다. 말했다시피, 시는 매우 많은 사람들의 매우 오래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수가 인정하는 소수의 이론가들이 있다. 이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스위스 문예학자 에밀 슈타이거다. 그에 따르면 시는 기억을 가지고 만드는 장르이다. 개개인의 기억은 저마다 다르다. 그러니까 한 편의 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시를 쓴 사람 한 명 뿐이다.

이 시도 마찬가지다. 나는 기차표 운동화를 모른다. 시도, 운동화도 저 시인의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어쩐지 이상하다. 내 속에서도 시의 마음 조각조각이 찾아진다. 다 큰 언니를 좋아하던 마음, 운동회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던 기억, 의지하던 사람을 잃어버린 아픔, 북적거리는 운동회에서 서러웠던 느낌. 시를 읽다보면, 다알리아 꽃밭 앞에 서서 펑펑 울던 여자아이의 눈물이 내 것인 양 느껴진다.

시는 분명 시인의 지극히 개인적인 추억에서 시작된다. 시작이 그럴 뿐이다. 남모를 추억은 내게로 날아와서 나만 아는 추억의 문을 열어준다. 참으로 이상하고 신비로운 일이다. 얼굴 모르는 당신의 추억이 내 추억을 일으켜 세우다니.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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