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73화> 경남 고성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던 1919년 3월, 경남 고성군 덕선리 선동마을에 사립학교 철성의숙이 있었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박거수(사진)가 1908년 사재를 털어 세운 학교로, 국은(國恩)·사은(師恩)·부은(父恩)을 기반으로 하는 애국애족 정신으로 나라를 되찾고 조국의 완전독립을 꾀하는 것을 교육 목표로 삼았다. 애국가를 부르게 하고 운동장 주변에 무궁화를 심었다. 개천절에는 대운동회를 열어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애국애족 정신을 지닌 인재들을 양성해 온 철성의숙은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1930년 폐교되기 전까지 22년간 민족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담당했다(독립기념관,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
1919년 3월 15일 밤, 이 학교에 손님이 찾아왔다. 진주 출신 독립운동가 이주현이었다. 훗날 의열단에 가입한 그는 이듬해(1920년)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사건으로 체포돼 옥고를 치른 인물이다. 이주현은 철성의숙에 있던 박진완과 박거수에게 국내 사정을 설명한 뒤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며 고성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켜 달라고 당부했다. 고성 청년들인 배만두 이상은 김상욱도 연락을 받고 참석했다. 거사일은 이틀 뒤인 3월 17일로 정해졌다. 학생들은 배만두가 맡고, 기독교인과 농민 동원은 각각 이상은과 김상욱이 책임지기로 했다. 철성의숙은 고성 3·1만세운동의 시발점이었다(‘고성독립운동사’).
○ 학생들이 주축이 되다
거사일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만세운동 기획자들은 준비를 서둘렀다. 철성의숙과 박진완의 집에서 태극기를 제작했고, 배만두는 학생들을 만나 시위 동참을 당부했다. 안타깝게도 이 과정에서 시위 계획이 새 나가 일제 군경이 거사 당일 새벽 배만두 집을 급습해 그를 체포했다. 그 결과 1차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시위 동력이 약해져 가고 있을 때 젊은 학생들이 나섰다. 도쿄에서 2·8독립선언에 참여했던 일본 유학생 안태원과 고향에 머무르고 있던 부산상업학교 학생 서주조 등이 만세운동에 참여할 동지 규합에 나선 것이다. 이들은 고성공립보통학교 학생들과 수차례에 걸쳐 비밀회합을 가지면서 만세운동 참여를 호소했다.
“지금 각지에서는 일개 농부까지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고성은 무엇 때문에 이를 결행하지 않는가? 지금은 수수방관(袖手傍觀)할 시기가 아니다.”
이들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안태원과 서주조는 학생 200여 명과 3월 22일 고성읍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1차 거사에 실패한 지 닷새 만에 만세 함성이 울려 퍼진 것이다. 시장에 모인 사람들도 시위에 동참해 만세를 불렀다. 일제 군경은 총칼로 학생들을 위협하고 주동자들을 체포했다. 학생들의 만세시위는 경찰의 탄압과 주동자 검거로 오래 지속되진 못했지만 주민들에게 커다란 자각과 용기를 불러일으켰다(‘독립운동사’).
고성군 주민들은 학생 시위 열흘 뒤인 4월 1일 고성읍 쌀시장에서 다시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날 오후 4시 30분경 시장에 수백 명이 모여 들자 김진만 문상범 등이 감춰둔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수백 명의 군중이 따라서 만세를 불렀다. 이날 시위에는 삼산면에서 천도교도들을 이끌고 온 강대현과 노웅범도 힘을 보탰다.
갑작스러운 대규모 시위에 놀란 일제 군경은 사천에 주둔 중인 헌병분견대 병력을 지원받고 재향군인, 소방대원까지 총동원해 시위를 진압했다. 일본 상인들까지 엽총을 들고 나왔다. 이 과정에서 문상범이 일본군의 총검에 쓰러졌다. 그가 흘린 피로 시장 내 샘물터가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이날 시위로 주동자 7명이 체포됐다. 김진만과 문상범이 각각 징역 4개월과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 일제를 놀라게 한 연합시위
고성의 만세시위는 군청 소재지였던 고성읍보다 고성군 북동쪽에 위치한 구만면과 회화면 일대에서 더 거세게 진행됐다. 고종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했던 일부 인사들이 서울에서 3·1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돌아온 뒤부터 은밀하게 만세시위를 준비한 결과였다.
때를 기다려 온 시위 기획자들은 배둔시장 장날인 3월 20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당시 배둔시장은 고성군의 7개 면과 창원, 함안에 인접한 곳에 위치해 장날이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큰 시장이었다. 시위 기획자들은 한문학자 이종홍에게 부탁해 독립선언서 요약본을 만든 뒤 필사해 주변 12개 동리(洞里)에 전달하기도 했다.
3월 20일 오후 1시경 구만면 당산마을의 야산에서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를 신호로 구만면을 관통하는 국천(현재는 구만천) 모래사장에 지역 주민 수백 명이 모여들었다. 구만면 시위를 주동한 최낙종 선생(건국훈장 애국장)의 손자 최연도 씨는 “하천이 S자 모양으로 흐르면서 안쪽에 모래가 쌓이는 국천 모래사장은 면적이 넓어 집결 장소로 제격이었다”며 “시위 모의는 면사무소와 가까운 할아버지 생가에서 이뤄졌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시위 시작에 앞서 최정원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이어 허재기가 공약 3장을 지킬 것을 다짐했다. 주동자들의 선창에 이은 주민들의 만세 함성이 산과 들로 울려 퍼졌다. 각오를 다진 시위대는 10리(약 4km) 떨어진 배둔시장을 향해 행진했다. 시위 정보를 입수한 일제 군경은 도로에 저지선을 구축했다. 일본군은 말을 타고 시위 행렬 가운데로 돌진해 군중을 짓밟았고, 총칼로 위협했다.
하지만 시위대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격분한 시위대는 말을 탄 헌병을 포위해 크게 꾸짖고, 나팔수는 달려드는 말의 귀에 대고 나팔을 불어 말을 날뛰게 만들었다. 시위를 주도했던 최정원이 총부리 앞에서 가슴을 열어젖히며 “쏠 테면 쏴 보라”고 맞서자 그의 기세에 눌린 일본군은 물러섰다.
구만면 시위대는 일본군의 저지선을 돌파해 배둔시장에 도착했다. 시장에는 전날 밤 연락받은 회화면 시위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700∼800명의 시위대는 해방이 된 것처럼 만세를 불렀다. 일제 군경이 주동자들을 체포하려 하자 최정주가 나서 헌병 오장의 엄지손가락을 꺾어 붙잡힌 동지를 구출해냈다. 결국 이날은 아무도 체포되지 않았고, 시위대는 자진 해산했다.
○ “한인 관리들은 물러나라”
구만면 시위대는 회화면 배둔시장에서 성공적으로 시위를 벌인 뒤 그날 마을로 돌아왔다. 허재기 등이 작성한 ‘한인관리퇴직권고문’을 면서기 이재홍에게 등사하게 했고 그중 1장을 구만면사무소 정문에 붙였다.
‘한인 관리는 조속 용퇴하라. 불원장래(不遠將來)에 후회 막급하리라. 반만년 문화민족으로서 비열한 도이(島夷·일제를 지칭)의 압박에 신음한 지 이미 10년이다. 불국(프랑스) 파리에서는 만국평화회의가 개시되고 미국 윌슨 대통령으로부터 민족자결주의가 선포됐다. 우리의 독립운동은 일시적 시도가 아니요, 세계 열방의 공인인 동시에 실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만년대계(萬年大計)다. 조상에게 득죄(得罪)도 득죄려니와 끝내 민족 반역자의 처단을 면치 못할 것이니 다시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요, 기회가 기회인 만큼 주저할 여지도 없다. 현장을 탈퇴함으로써 한인의 자체에도 손색이 없고 국가 독립 후에는 당당한 관리로 등용될 것은 공의와 실정이 증명하는 바이다. 만대의 영욕과 일생의 성패가 좌우되는 기로이니 반성해라. 시기가 절박했으니 맹성(猛省·깊이 반성함)해라.’
‘대한독립동맹(大韓獨立同盟)’ 명의로 된 이 권고문은 다음 날 여러 시군의 관공서로 발송됐다. 배둔시장에서 주동자 검거에 실패한 일제 군경은 일본 재향군인들의 도움을 받아 만세시위 경위를 상세하게 조사한 뒤 핵심 인물들을 잡아들였다. 구만면·회화면의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허재기 최정원 최낙종 이정수 문태룡 구영서 서찬실 김동기 등이 체포됐다. 특히 허재기는 사건 전체를 주도한 것으로 드러나 2년간의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구만면과 회화면 만세시위를 기리는 ‘3·1운동 창의탑 보존위원회’의 최근호 위원장은 “배둔시장 시위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3월 19일에 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있다”며 “올해는 3·1운동 100년을 맞아 100년 전 시위대들이 행진했던 국천 모래사장-배둔시장 구간에서 카퍼레이드와 시가행진을 했다”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