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들 덕에 감시망 피해”… 독립운동가들 피신처 호국사찰 ‘옥천사’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28일 03시 00분


[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신화수, 의열단원 김상옥과 의기투합… 혁신단 만들고 기관지 발행 투쟁
한봉진도 군자금 모집하다 옥고

신화수, 한봉진 승려가 활동했던 고성군 옥천사 전경. 고성군 제공
신화수, 한봉진 승려가 활동했던 고성군 옥천사 전경. 고성군 제공
‘조선독립운동자 검거.’

1921년 5월 12일 일제 육군성은 이런 제목의 대외비 문서를 내각총리대신 앞으로 보냈다. 2년 전 일어났던 독립운동과 유사한 활동을 계획하던 조선인들을 체포했다는 보고였다. 이틀 뒤 동아일보는 ‘제2차 독립운동을 계획하던 김두현 외 12명이 경남경찰부에 전부 잡혔다’고 보도했다. 일본군 보고서와 이 기사에는 모두 13명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여기에 경남 고성군 옥천사의 승려 한 명도 포함돼 있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 옥천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들의 병영으로 사용됐던 호국사찰이다.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던 1919년, 항일정신이 투철했던 옥천사 승려 신화수(사진)와 한봉진은 애국지사들을 적극 도왔다. 대한독립청년단 단원으로 경남 서부지역의 만세시위를 담당했던 변상태, 고성군 고성읍 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한 이주현(1920년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사건으로 옥고를 치름) 등이 옥천사를 피신처로 삼아 활동했다. 이들은 옥천사 승려들이 잠자리와 식사뿐만 아니라 각종 활동 편의를 제공한 덕분에 일제 감시망을 피할 수 있었다.(‘고성독립운동사’)

두 승려는 만세운동이 잠잠해진 뒤에도 독립운동에 대한 열망을 숨기지 않았다. 신화수는 1921년 25세의 나이로 제2 독립운동을 계획하다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신화수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승복을 벗고 농사꾼 차림으로 돌아다니며 거사 계획을 논의했다. 하지만 일제 헌병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고향 친구의 밀고로 옥천사에서 체포됐다.

신화수는 석방된 뒤 의열단원 김상옥 등과 함께 혁신단을 조직해 기관지 ‘혁신공보’를 발행하는 등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그 와중에 1923년 또 한 차례 옥고를 치른다. 중국에서 국내로 잠입한 김상옥이 그해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뒤 은신하다 1월 22일 일제 경찰과 교전 끝에 자결한 사건에 연루됐기 때문이다. 신화수는 김상옥에게 군자금 1000원을 제공한 혐의를 받았다.

옥천사 승려 한봉진도 임시정부의 일을 돕다 옥고를 치렀다. 일제 판결문에 따르면 그는 1920년 임시정부가 국내에 파견한 고성군 출신 요원 윤영백과 함께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인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고성=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3·1운동 100년#독립운동#신화수#한봉진#옥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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