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74화> 한성임시정부
1919년 3월 중순, 33인 민족대표들의 뒤를 이어 비선(2선) 조직원으로 활동하던 기독교 전도사 이규갑(1888∼1970)은 일제 경찰을 피해 조카의 집에 은신 중이었다. 당시 일경과 헌병은 3·1운동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33인 민족대표들과 3월 5일 남대문역(현 서울역) 시위를 이끈 학생대표단을 체포한 뒤, 나머지 시위 주동자들을 잡기 위해 밤늦게까지 검문검색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 연락이 닿은 동지 8명이 그의 은신처를 찾았다. 3·1운동의 조직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면 당장에 독립을 쟁취할 수 없더라도 이를 바탕으로 장차 독립투쟁을 위한 전열을 정비하는 구심점이 될 것이다.”(이규갑 증언, ‘한성임시정부 수립의 전말’·신동아 1969년 4월호)
당시 독립운동을 이끌어갈 중심 조직도 절실했다. 3·1운동 이후 시위는 계속되고 있었다. 시내 각지에는 ‘동포여 일어나라’ 등의 독립투쟁을 독려하는 격문이 뿌려졌다. 동아연초주식회사 직공(3월 9일)과 전차 차장·운전수(3월 8∼10일) 등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고, 상인들도 철시 운동 등을 벌였다. 덩달아 일경은 무자비하게 진압에 나섰고 피해 규모는 커져만 갔다. 희생자 수가 늘어나면서 독립 운동의 열기는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다. 운동 지도부로선 방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전국 13도를 대표하다
모임 결과 이규갑이 임시정부를 조직하는 일을 맡기로 했다. 민족대표 33인의 밀사로 중국 상하이(上海)에 파견된 현순이 이규갑에게 보낸 편지도 영향을 미쳤다. 현순은 국내에서 국민대회를 열어 임시정부 구성 절차를 밟도록 요청했다.(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3·1운동’)
하지만 항일 감정만을 앞세워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규갑은 국민 전체 의견을 대신할 지역 대표나 독립운동 단체의 대표들을 한자리에 모아 대표성을 인정받기로 했다. 홍진(홍면희·1877∼1946·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등이 그의 뜻에 공감했다.
3월 17일 오전 경성부(서울) 내수동 64번지 현직 검사 한성오가 사는 자택.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검사직을 박차고 나와 변호사로 활동하던 홍진이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고른 비밀 독립운동본부였다. 이날 이규갑과 홍진을 비롯해 한남수, 이동욱, 이교헌, 윤이병, 윤용주, 이용규, 김규, 최전구, 김사국, 이민태, 민강 등 20여 명이 참석했다. 독립운동을 이어갈 새로운 지도부인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위원회’의 시작이었다.
준비위원회의 진행을 맡은 이규갑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전국 13도 민족대표가 모이는 국민대회 개최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당시 일제는 한반도를 13개 도로 나누어 도장관(道長官·도지사급)을 임명해 통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각 도를 대표하는 민족운동 지도자들이 정부를 세워야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게 이규갑의 아이디어였다.
“임시정부를 당장 조직해서 일제의 침략 잔당을 깨끗이 숙청, 극복하여 수권기관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목표 달성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홍진 발언, ‘한성임시정부의 수립과 민족운동’)
이날 준비위원회는 ‘한성임시정부’라는 호칭을 결정했다. 또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자 대회를 열고, 국민대회를 거친 뒤 임시정부 수립을 공포하기로 했다. 승려 신분인 이동욱이 국민대회 취지서와 임시정부 선포문 및 약법(約法·일종의 헌법) 등의 초안을 만들기로 했다.
국민대회에 참석할 13도 대표로는 모두 25명(조만식 이춘규 강훈 김유 최전구 이래수 유식 김명선 기식 김탁 박한영 이종욱 유근 주익 김현준 박장호 송지헌 강지성 홍성욱 정택교 이용준 이동욱 장정 장근 박탁)이 선정됐다. 3·1운동을 이끈 독립지사와 학생, 농민, 노동자, 언론인, 종교인, 교육인, 기업인 등 각계 대표가 망라됐다. 임시정부 설립 실무를 맡은 홍진과 이규갑, 김규(유림 지도자), 민강(동화약방 설립자) 등은 연락책임위원이 돼 전국 주요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13도 대표자들을 찾아가 설득하기로 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보름 후인 4월 2일 인천의 만국공원(현재 자유공원) 광장으로 대표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이곳이 대표자회의 장소로 정해진 데는 만국공원이라는 이름이 가진 상징성도 영향을 미쳤다. 세계 모든 나라가 모이는 ‘만국의 장’에서 당당히 독립 의지를 보여주자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공원 주변이 중국인과 서양인들이 거주하는 조계지(租界地)로서 치외 법권 지역이라는 점도 고려됐다.
모임은 은밀히 진행됐다. 대화는 일절 삼가고 흰 헝겊이나 창호지를 둘러 싸맨 손가락을 서로 내밀어 확인했다. 3·1운동 이후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잇따르면서 몇몇 대표자가 지명 수배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규갑도 인천역에서 일경의 불심 검문을 받았다. 다행히 변호사인 홍진이 “이 사람은 약장사 하는 사람으로 우리와 일행”이라고 둘러대는 바람에 간신히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오후 3시경 약속장소에 20명가량이 모여들었다. 경성에서 활동하던 기독교계, 불교계, 천도교계, 유림계 대표들은 대부분 참석했다. 지방대표로는 경기 강화도와 수원시 등 인근 지역의 인사들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일경의 감시에 먼 거리에 있던 지역대표들은 참석하지 못했다. 공원 인근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긴 이날 참석자들은 경성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기로 했다.
○ 독립운동의 정통성을 확보하라
4월 17일 비밀독립운동본부인 한성오의 집. 이동욱이 기초한 약법과 국민대회 취지서 및 선포문 등이 공개됐다. 취지서에는 13도 대표자 25명의 서명도 실렸다. 임시정부 기구와 각원(閣員) 명단도 완성됐다. 현석칠이 목각으로 국민대회 취지서와 선포문 등을 6000장 인쇄했다. 취지서에는 독립운동의 정통성이 33인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과 13도 민족대표자들이 모인 국민대회에 있다는 내용도 담았다.
“우리 민족은 손병희 등 33인을 대표로 하여 정의와 인도에 기본한 조선독립을 선언했다. 지금 그 선언의 권위를 존중하며 독립의 기초를 견고케 하며, 인도(人道) 필연의 요구에 보답하기 위하여, 전 민족 일치의 동작으로 대소 단결과 각 지방 대표를 종합하여 본 회를 조직하고 이를 세계에 선포하노라.”
또 △일본 정부의 조선통치권 및 군대 철거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대표자 선정 △일본관청에서 재직하는 조선인 관공리(官公吏) 퇴직 △일반인의 각종 납세 거부 등을 결의했다. 약법은 제1조 국체(國體)는 민주제를 채용함, 제2조 정체(政體·정치체제)는 대의제를 채택한다고 밝힘으로써 대의민주제를 천명했다.
한성임시정부의 초대 각원 명단은 화려했다. (최고 권력자인) 집정관 총재에 이승만, 국무총리 총재 이동휘, 외무부총장 박용만, 내무부총장 이동녕, 군무부총장 노백린, 재무부총장 이시영, 법무부총장 신규식, 학무부총장 김규식, 교통부총장 문창범, 참모부총장 유동열, 노동국총장 안창호 등 13명이 임명됐다. 이규갑은 회고에서 “한성정부는 해외망명 정부로 유지할 수밖에 없었기에 우리가 임명한 각원들도 전부 당시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애국지사들로 충당했다”고 설명했다.
4월 23일 한성정부가 마침내 선포됐다. 김유인 이춘균 등 학생조직이 자동차에 ‘국민대회, 공화 만세’ 등의 문구가 쓰인 깃발을 달고서 국민대회 취지서, 임시정부 선포문, 임시정부령 등이 담긴 전단을 뿌렸다. 종로구 서린동 봉춘관에서 열릴 예정이던 13도 대표자회의는 대표들의 불참으로 무산됐지만 학생들은 종로 보신각과 탑골공원 등 경성 사대문 안 곳곳에서 임시정부의 탄생을 선포하며 길거리를 누볐다. 이날 시위로 일경에 검거된 사람만 270명에 달했다.
한성정부의 설립은 곧장 대중에게 알려졌다. 이날 지하신문인 ‘국민신보’ 제11호는 “조선 13도 대표자가 모여 우리 이천만의 뜻을 모아, 세계에 부끄러움이 없을 만한 세밀하게 가(假)정부를 조직해 열국에 공포했다”고 보도했다. 한성정부의 성립 사실은 윤치호 등 기독교 세력과 국내 민족운동계에 알려지고 경성발 연합통신(UP) 소식으로 해외 한인사회에까지 퍼져나갔다.(이현주, ‘임시정부의 수립과 초기 활동’)
이규갑은 후일담에서 국내 13도 대표자들이 선포한 한성정부는 해외의 독립지사들에게 정통성 있는 정부로 인식돼 향수와 동경의 대상이 됐다고 자랑했다.
▼ “혼선 우려” 상하이-한성 등 3곳 통합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
3·1운동 후 국내외에는 6개의 임시정부가 난립했다. 이 중 러시아령(露嶺)의 대한국민의회, 중국 상하이의 상하이임시정부, 국내의 한성정부 등 3곳만이 정부 기능이 가능한 조직이었다.
1919년 4월 한성임시정부 설립을 추진하던 홍진과 이규갑은 상하이에서도 정부 수립을 추진한다는 소식을 접한다. 두 사람은 실체 파악을 위해 4월 20∼21일경 한성임시정부 행사를 실무진에게 맡긴 후 직접 상하이로 찾아갔다. 국민대회 취지서와 한성정부 조각 명단 등을 담뱃갑과 성냥갑 속에 숨긴 채였다.
이규갑은 위험을 무릅쓴 당시 방문 이유에 대해 “만약 상하이에 이미 임시정부가 섰다면 결국 두 개의 정부가 생긴 셈이니 이를 어찌할 것인가. 양자 간에 서로 불화라도 생긴다면 우리 독립운동 전선에 크게 혼선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들의 우려대로 상하이임시정부는 이미 4월 11일 출범한 상태였다. 따라서 이들이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에는 한성임시정부와 상하이임시정부의 통합이 급선무가 됐다. 이규갑과 친분이 있던 도산 안창호가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규갑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소개했다.
“나는 (도산에게) 한성정부보다 상하이정부가 단 며칠이라도 먼저 생겼으니 우리가 상하이정부에 합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양보하였다. 도산은 아무리 상하이정부가 활동력 있는 쟁쟁한 독립투사들이 만든 것이라 하더라도 이는 나라를 떠난 유랑자들에 의하여 된 정부이고 한성정부야말로 국내에서 13도 대표들이 모여 국민의 총의에 입각하여 만든 정부이니 상하이정부를 해체하고 한성정부의 법통에 순응해야 한다고 극력 사양하였다.”(‘한성임시정부 수립의 전말’·신동아 1969년 4월호)
1919년 9월 초, 두 정부의 통합을 위한 임시 헌법개정안과 임시정부개조안이 상하이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확정됐다. 이 자리에서 안창호는 “우리 정부의 유일무이함을 내외에 표시하는 것이 긴요한 일인데, 이렇게 하려면 상하이정부를 희생하고 한성의 정부를 승인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한성정부와 상하이임시정부의 통합은 러시아령 임시정부와의 통합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1919년 9월 11일 3개 임시정부가 통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출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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