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두’ 정여창 선생 대쪽정신 숨쉬는 터전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0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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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남계서원

일두 정여창 선생을 기리는 경남 함양군 수동면 남계서원. 왼쪽이 묘정비각, 오른쪽이 명성당이다. 함양=강정훈 기자 manman@donga.com
일두 정여창 선생을 기리는 경남 함양군 수동면 남계서원. 왼쪽이 묘정비각, 오른쪽이 명성당이다. 함양=강정훈 기자 manman@donga.com
제18호 태풍 ‘미탁’이 한반도로 상륙하려던 1일 오후 경남 함양군청에서 남계(灆溪)서원으로 향하는 함양로 왼쪽에 우뚝 선 백암산(해발 622.5m)이 한눈에 들어왔다. 산 정상의 기암절벽, 산허리를 두른 하얀 구름이 아름다운 산수화를 그려냈다. 황금빛이 짙어가는 들녘엔 풍요가 넘쳤다.

“남계서원은 구릉을 등진 자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서원 앞으로는 덕유산에서 시작된 남계천이 흐릅니다. 그 앞 넓은 들판 너머 안산(案山)인 백암산이 서원을 마주 보고 있습니다.”

함양 사람인 임숙조 문화관광해설사(56)의 설명은 차분했다. 그는 “남계서원은 조선 성종 때 대학자인 일두(一두) 정여창 선생(1450∼150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제향하기 위해 1552년 개암(介菴) 강익 선생 주도로 유림, 주민들이 참여해 창건했다”고 소개했다. 조선시대 두 번째 서원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도 견뎌냈다. 일두는 ‘한 마리의 좀벌레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정여창 선생이 스스로를 낮춰 부르는 의미로 지었다. 일두 선생은 김종직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조의제문(弔義帝文)에 연루돼 사화(史禍)를 비껴가지 못했으나 훗날 복권됐다. 안음현감 당시 업무처리가 공정해 백성의 칭송이 많았다.

임 해설사와 서원 정문인 풍영루(風영樓)에 들어설 무렵 후드득 비가 떨어졌다. 우산을 받치고 찬찬히 서원을 거닐었다. 좌우 두 개의 연지(蓮池)를 지나자 일두 선생을 기리는 묘정비각(廟庭碑閣)이 맞아준다. 강학공간을 구성하는 중심 건물인 명성당(明誠堂)은 정면 4칸 규모. 중앙 2칸은 마루다. 양쪽 1칸은 온돌방으로 된 협실. ‘명성’은 중용의 ‘밝으면 성실하다’에서 따왔다.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듯하다.

이미연 함양군 홍보담당은 “남계서원은 제향공간을 서원 뒤에 두고 강학공간은 앞쪽에 배치하는 ‘전학후묘’ 서원건축 양식을 잘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명성당 뒤 가파른 계단을 오르자 경사지 위 높은 곳에 위치한 사당이 단아한 모습을 드러냈다. 강학 공간과 ‘적극적 분리’는 엄숙함으로 다가온다. 일두 선생을 주벽으로 좌우에 개암 강익, 동계 정온 선생 위패가 모셔져 있다.

임 해설사는 “세계문화유산 지정 이후 서원 방문객도 크게 늘어 주중엔 300여 명, 주말엔 1000명 안팎이 찾는다”고 말했다. 이창구 사단법인 남계서원 원장은 “서원에 배향된 세 분 어른의 실천유학, 나라사랑, 충효 정신을 일깨워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그 뜻을 잘 전달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함양=강정훈 기자 manman@donga.com
#한국의 서원#세계문화유산#함양 남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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