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토요일 오전 요리수업 중에 있었던 일이다. 주말 이른 시간이라 아침도 거르고 왔을 것이 뻔한 수강생들을 위해 속도를 내고 있는데 갑자기 가위바위보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낙심한 패배자가 뛰쳐나가더니 빛의 속도로 캔맥주를 사 들고 들어왔다. 도저히 술 없이 넘기기 힘든 요리라는 것이 그들의 변이었다. 그날의 메뉴들이 유독 짭짤하고 기름진, 술을 부르는 메뉴 일색이었다. 나처럼 술 못하는 먹보에게는 ‘술 없이는 못 먹는 요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런 내게도 술맛이 느껴지는 순간이 몇 번은 있었다.
요리사 생활을 접고 잠시 쉬던 중에 체력을 키워두겠다고 매일 아침 6km씩 달리기에 열중하던 시절, 어느 날 지인들과 마신 몇 잔의 청주가 인생 최초로 달다고 느낀 것이다. 주변에서는 체력이 최상일 때 술맛도 최고라며, 분발해서 아마추어 하프마라톤을 나가보라는 권유가 이어졌다. 두 번째는 인생 최고 고난의 시기였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던 때 받아 마신 독주는 전혀 달지 않았지만 소주 석 잔에 나가떨어지는 주량이 무색하게 여러 잔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 ‘기적’을 경험했다. 세 번째는 몇 년 전 스페인 여행에서다. 미식도시 산세바스티안 근교의 레스토랑에서 처음 맛본 스페인 와인에 빠져, 초반부터 와인을 들이켜다가 메인 요리가 나오기도 전에 만취해 화장실에서 30분을 쓰러져 있다가 웨이터가 깨우는 바람에 간신히 정신을 수습했던 일이 있다. 상큼한 풀과 과실이 혼합된 듯 향기가 폭발하던 스페인 와인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수준의 역대급 창피함을 무릅쓰고 공개할 만한, 뇌가 추억하고 혀가 기억하는 와인이었다.
맛은 주관적 평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개인의 취향이 늘 개입되기 때문이다. 스페인에서 나를 혼돈에 빠뜨렸던 와인만큼 맛있는 와인을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날의 와인이 나를 홀린 것은 맛있는 요리, 훌륭한 서비스, 식당의 분위기, 아름다운 자연이 조미료를 잔뜩 쳐줬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맛있는 요리는 최고의 조미료다.
얄팍하게 튀김옷을 입혀 과자처럼 짭짤하게 튀겨낸 오징어에 아이올리 소스를 콕 찍었을 때, 육수를 졸인 브라운소스를 곁들여 튀긴 듯 구운 듯 바삭한 닭다리를 날렵한 나이프로 썰어낼 때, 느끼한 버터향이 풍기는 매시트포테이토와 함께 레드와인에 푹 조려낸 쇠고기 볼살을 씹을 때, 구수한 라구에 버무린 넓적한 파스타를 포크로 듬뿍 말아 올렸을 때, 얇게 저민 하몬과 치즈를 올린 뇨키를 포크로 콕 찍었을 때, 곁에 있어야 할 존재는 와인이다. 요리가 와인을 부르고 와인이 요리를 부르는 상호 교감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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