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호 ‘세종 카운터웨이브’전
비닐봉지와 함께 13년 세계 누벼… 사진과 영상으로 색다른 지구 조명
검은색 코트를 입은 사내가 서 있다. 그 앞에 검정 비닐봉지가 바람에 흩날린다. 비닐은 르코르뷔지에의 유명 건축물인 프랑스 롱샹성당으로 날아가기도 하고,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광장, 피사의 사탑, 중국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으로도 흘러간다. 사내의 얼굴에서 출발한 드론의 카메라는 검정 비닐을 쫓아가다가 세계의 랜드마크 건축물을 천천히 밑에서 위로 훑으며 치솟는다. 우주에서 내려다본 마을과 도시, 지구는 둥그렇게 원이 된다….
13년째 검고 흰 비닐봉지와 함께 세계 각국의 자연과 건축물을 촬영하며 여행하는 사내가 있다. 퍼포먼스, 조각, 설치, 미디어아트 등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해 온 작가 이경호(52·사진). 유튜브에 공개된 그의 영상은 우리가 사는 도시와 건축물, 지구를 색다른 차원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프랑스 유학 시절 파격적인 퍼포먼스와 설치작업으로 주목받았던 그는 2006년 우연히 비닐봉지가 선풍기 바람에 날리는 모습에 매료됐다고 한다. 이후 경북 경주, 비무장지대(DMZ)와 같은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곳곳에서 ‘봉다리의 비행’을 담은 ‘Some Where’ 시리즈를 제작했다. 그는 “마치 일기장을 적는 것처럼 가는 곳마다 도시의 건축물을 배경으로 현지에서 썼던 흰색, 검은색, 노란색 비닐봉지를 날리며 촬영했다. 구속 없이 자유로운 ‘봉다리의 여행’에는 짙은 허무주의도 배어 있다”고 말했다.
그의 봉다리는 2009년부터 다른 의미를 갖게 됐다. 생태 사상가 토머스 베리(1914∼2009) 연구 모임인 ‘지구와 사람’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봉다리는 지구온난화와 생태계 파괴의 주범인 ‘검은 석유덩어리’를 상징하게 됐다. 그는 2, 3년 전부터는 드론을 활용해 검은 봉다리의 비행을 좇고 있다. 알프스산맥의 빙하가 녹는 산골, 해수면 상승으로 수몰 위기에 처한 태평양의 마을에도 봉다리는 날아다닌다. 드론 촬영 영상은 작은 비닐봉지에서 출발해 하늘에서 내려다본 전 지구적인 모습으로 확대되기 때문에 시각적 충격을 더한다. 그는 “두렵다고 피할 것이 아니라 더욱 직시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환경 파괴의 주범인 비닐봉지를 ‘생태운동’의 모델로 삼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개막한 ‘세종 카운터웨이브’ 전시에서 신작 ‘흑 백’을 선보였다. 전시장 내부에 설치된 선풍기 바람에 검은색, 흰색 비닐봉지 수십 개가 끊임없이 유영하는 작품이다. 전시 장소인 광화문의 장소성에 주목한 작품으로, 흑백의 봉다리는 촛불과 태극기 시위가 벌어지는 광화문광장의 좌우, 남북, 계층 간의 분노와 대립을 풍자하는 상징이다. 이 작가는 “자유롭게 섞이며 날아다니는 봉다리를 보며 우리 현실을 되돌아보고, 사람뿐 아니라 자연과 동물까지 생각하는 시간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12월 1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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