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78화> 충남 청양
지난달 28일 찾은 충남 청양군 화성면 수정리 물안이마을 입구엔 태극기 열두 기가 날리고 있었다. 수정리(水汀里)가 우리말로 옮겨진 물안이마을은 주민이 50명도 채 안 되는 곳이다. 이 작은 마을에서 열두 명의 애국지사가 나왔다. 열두 기의 태극기는 이들을 상징한다.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하루 앞두고 주민들은 마을 입구에 모여 국기 게양식을 열고 만세운동을 재현했다.
물안이마을은 청양 독립운동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청양은 일제강점기 충남에서 인구가 가장 적을 정도로 군세(郡勢)가 열악했지만 176명의 독립유공자(2016년 기준)를 배출했다. 충남에서는 두 번째, 전국에서는 세 번째(안동 339명, 홍성 201명)로 많다. 김진호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에 따르면 3·1운동 때 일제에 체포돼 태형 처분을 받은 청양 인사 중 최고 태형인 태(笞) 90도(度)를 당한 사람은 50%가 넘는다. 그만큼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큰 지역이었다는 뜻이다.
○ “우리는 스스로 나라를 다스린다”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될 즈음 정산면 백곡리에 살던 19세 청년 홍범섭은 상경한다. 종로의 한 여관에서 독립선언문을 입수한 그는 귀가해 이웃 청년들을 집으로 불렀다. 이 자리에서 홍범섭은 서울의 정세를 설명하고 “우리도 망국의 한을 풀게 되었다”고 밝힌다. 청년들은 함께 독립선언문을 읽어 내려갔고 태극기 10장을 만들었다. 청양에서 가장 큰 규모로 펼쳐진 정산면 서정리 장날 만세운동의 시작이었다.
4월 5일 오후 3시 청년들은 시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제는 조기 진압 방침을 세우고 장이 서는 곳마다 경찰이나 헌병을 파견했다. 정산시장에도 일제 헌병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홍범섭 등 주도 인사 10여 명이 서로 손을 잡고 만세를 외치면서 시장으로 들어서자 일제 헌병들은 즉시 제압에 나섰다.
하지만 청년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15분 뒤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면서 다시 시장진입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장꾼 100여 명도 호응했다. 헌병들이 또다시 제지에 나섰지만 시위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한 헌병들은 주도 인사들을 체포해 파견대로 연행했다.(‘청양독립운동사’,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이때 권흥규(1852∼1919)가 앞장서기 시작했다. 독립의군부 청양군 대표로 활동했던 그는 만세운동 당시 정산 향교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죽음을 각오한 그는 쌀 한 말을 구해 가족에게 주고 집을 나섰다.(‘독립운동사’,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헌병대를 따라가면서 항의하는 과정에서 시위대 규모는 700여 명 수준으로 늘어났다. 정산으로 들어가는 시장 북쪽 길목에 위치한 헌병대의 주재소 앞에서 권흥규는 “우리나라는 독립하여 스스로 나라를 다스리니 빨리 물러가라”며 크게 소리쳤다. 구금자 석방 요구가 점차 거세지자 헌병들은 공포탄을 두 차례 발사하면서 해산을 종용했다. 이에 67세 노인 권흥규는 앞가슴을 풀어헤치고 헌병들 앞으로 나서며 연행자를 내놓으라고 외쳤다. 헌병이 그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권흥규는 왼쪽 팔에 총상을 당하고도 계속 앞가슴을 내밀면서 항거했다. 헌병이 다시 권흥규의 앞가슴을 향해 총을 쏘았고 그는 현장에서 숨졌다. ‘이날 밤은 유난히도 비가 많이 왔다’고 ‘독립운동사’는 적고 있다.
○ 운구 행렬이 만세시위가 되다
권흥규의 순국은 정산면 시위가 다음날까지 이어지는 기폭제가 됐다. 시장 사람들이 권흥규의 시신을 헌병들로부터 인수해 목면 안심리에 있는 고인의 자택으로 운구했다. 권흥규의 친척 권영진이 명정(銘旌)에 다음과 같이 썼다. ‘배일사권공지구(排日士權公之柩·일본을 배척했던 선비 ‘권’공의 관).’ ‘대한독립만세’ 깃발과 많은 만장(輓章)들이 운구행렬을 이뤘다. 헌병 파견대를 떠난 군중 300여 명은 정산시장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고 자택으로 가는 길목마다 노제(路祭)를 지내고 통곡했다. 집으로 가는 15리(약 6km) 길을 군중들이 뒤따르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했다. 운구 행렬이 만세시위가 된 것이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여긴 파견대 헌병들은 청양 헌병분견소와 공주 수비대에 지원을 요청한다. 공주에서 출동한 헌병과 수비대 보병들이 주민들과 맞부닥쳤다. 호곡(號哭) 대신에 독립만세를 부르는 운구 행렬이었다. 무차별 사격이 가해졌고, 그 자리에서 고인의 조카딸과 상여꾼 등 5명이 숨졌다. 고인의 딸은 적의 칼날을 손으로 막다 손가락이 잘렸고 볼에 총알이 관통했지만 겨우 죽음은 면할 수 있었다.(‘독립운동사’)
운구 행렬은 밤이 돼서야 고인의 자택에 닿았다. ‘청양독립운동사’에 따르면 이날 만세를 부르며 운구 행렬에 참여한 인사와 문상객은 1000여 명에 달했다. 곧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됐고 권영진이 ‘배일사권공지구’를 썼다는 이유로 붙들리는 등 166명이 체포됐다. 옷에 황토흙이 묻은 사람은 시위한 증거로 붙잡힌다는 소문이 나돌아 옷을 갈아입는 주민들도 있었는데, 갈아입은 사람도 수상하다며 검거됐다. ‘독립운동사’에서는 정산면 만세운동 때의 순국자와 옥고를 치르고 태형을 받은 사람들의 명단을 2쪽에 걸쳐 소개하고 있다.
‘기미의사 권흥규 선생 순열비’가 정산면사무소 입구에 세워져 있다. 1953년 정산중 교정에 만들어졌다가 1966년 초등학생 2만여 명이 의연금을 모아 다시 세운 것이다. 올 3월 권흥규의 자택이 있던 목면의 목면초등학교 운동장에서는 주민들과 초등학생 등 400여 명이 참석해 100년 전 일제에 맞서 고인이 불렀던 대한독립만세를 다시 외쳤다.
○ 신분과 직업을 초월한 만세운동
정산면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진 4월 5일 화성면에서도 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화성면 산정리 마을 주민 30여 명이 태극기 2기를 세워 놓고 큰 종을 울리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게 화성면 시위의 시작이었다.
화성면의 만세운동은 사흘 동안 계속됐다. 이튿날인 4월 6일에는 전날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사들이 오전 10시 화성면사무소에 모였다. 면사무소에서는 증축 공사가 한창이었다. 작업 인부 20여 명을 향해 시위대는 “조선은 이미 독립하였으므로 증축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면서 공사를 중단시켰다. 이어 이미 증설된 부분을 부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4월 7일에는 화성면 농암리에서 인근 화암리와 수정리 주민 70여 명이 함께 모여 만세 운동을 벌였다. 수정리는 물안이마을이 있는 곳이다.
4월 8일 화성면 화강리 김용학의 집에서 열린 결혼식에선 하객으로 참석한 21세 청년 강학남이 구장 이병규에게 만세를 권유하다 다투는 일도 생겼다. 강학남은 인접 마을에서 계속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자신의 마을에서도 이를 거행하고자 했다. 젊은 나이였기에 그는 구장 등 지지 세력이 필요했다.(‘청양독립운동사’)
“화성면의 농암리, 산정리에서는 조선독립시위 운동이 맹렬하고 대한국 독립만세를 부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유독 이 마을에서는 행해지지 않는가? 함께 주창자가 되어 독립만세를 크게 외치자.” 하지만 이병규는 “무익한 일을 하지 말라”며 강학남의 요구를 거절한다. 동석한 주민 김학성도 “너 혼자 불러라”라며 그를 질책했다. 분개한 강학남은 귀가하려는 이병규를 붙잡고 “꼭 주창자가 되어 만세를 외치라”면서 옷을 잡아끌고 머리를 붙잡으면서 때렸다. 이병규가 입고 있던 두루마기가 몇 조각으로 찢겨졌다.
다른 지역보다 늦게 만세운동을 시작했지만 연일 집중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펼친 것은 청양 지역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다. 정산면과 화성면뿐만 아니라 비봉면과 운곡면에서도 이틀에 걸쳐 만세 시위가 이어졌다. 더욱이 일제 당시 군 거주 인원이 많지 않던 청양에서 연인원 5700여 명이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한 것은 지역민들의 뜨거운 항일정신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김진호 연구원은 “청양 만세운동은 군내 각 면 주요 마을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전개됐으며 참여자들은 양반과 상민, 농민과 백정, 음식점 경영자 등을 아울렀다”면서 “신분과 직업 등을 초월해 독립을 위해 지역민들이 함께 만세를 외쳤던 것”이라고 말했다.
▼ 최고령 의병장 최익현, 청양의 기 받아 치열한 전투 ▼
‘청양 최익현 압송도’와 ‘…초상’
충남도, 유형문화재 지정해 기려
모덕사(慕德祠)는 충남 청양지역에 위치한 주요 독립운동 사적지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목면 송암리에 있는 이곳은 면암 최익현(1833∼1906)의 사당이다. 경기 포천에서 태어나 23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 요직을 두루 거쳤던 그는 병자수호조약 체결 반대 상소 등으로 유배당하고 을미사변이 발발했을 때 항일척사운동에 앞장섰던 애국지사다. 이후 최익현은 1900년 5월 청양에 자리 잡은 뒤 현재의 모덕사에서 문인들을 규합해 항일의식을 높이고 의병을 계획했다.
청양의 독립운동사는 크게 1895년과 1896년에 발생했던 전기 홍주의병과 1906년의 중기 홍주의병 투쟁, 1919년의 3·1만세운동으로 대표된다(박경목, ‘청양지역 독립운동의 기억과 기념’). 최익현이 을사늑약 이듬해인 1906년 전북 정읍시 태인면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최고령 의병장으로 앞장설 수 있었던 데에는 치열한 의병전투가 벌어졌던 청양에서 보낸 시간이 원동력이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군세에 비해 격렬하게 펼쳐졌던 청양지역 만세운동의 뿌리를 헤아릴 수 있는 대목이다.
충남도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올해 초 ‘청양 최익현 압송도’와 ‘최익현 초상’을 충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 고시했다. ‘최익현 압송도’는 의병운동을 하다 일제에 붙들린 최익현이 서울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다시 쓰시마섬으로 압송되는 과정을 자세히 담고 있다. ‘최익현 초상’은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로 꼽힌 채용신이 그린 것으로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최익현의 풍모를 적절하게 형상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두 작품 모두 청양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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