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의 불복 후유증, 토론으로 극복… 실록 보면 답답할 정도로 회의 거듭
신하뿐 아니라 백성 의견도 존중, 貢法 만들때 전국 17만명 여론조사
백년대계는 저항 딛고 꾸준히 추진… 下三道 향리 북방이주 관철시켜
관노비 장영실-서얼 황희 등용, 개방 인사로 흙수저 전성시대 열어
‘세종의 위대함’을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을까. 혹시 막연하게 ‘성군’으로 칭송하며 그를 왕조시대라는 과거에 묻어둔 건 아닐까. 한국사학계 원로인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81)가 세종실록을 바탕으로 사건과 업적을 조명한 ‘세종 평전―대왕의 진실과 비밀’(경세원)을 최근 출간했다. 1일 서울 관악구의 개인 연구실 호산재에서 만난 한 교수는 정치와 경제, 문화 강국을 이룩한 세종의 통치 비결을 설명하면서 “민주주의 제도라는 하드웨어의 약점을 ‘세종 스타일’의 소프트웨어로 보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민주주의 제도의 큰 문제가 소수의견을 묵살하니, 소수자가 승복을 안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반드시 후유증이 생겨요. 다수결과 투표라는 게 사실 숫자놀음이지요. 51% 찬성으로 결정했으면 반대한 49%는 잘못된 의견을 가졌던 건가요? 심지어 보통 40%대, 때로 30%대 득표를 하고도 대통령이 됩니다. 독재는 1인 독재건 다수독재건 나쁜 겁니다. ‘세종 스타일’에서 배워야 해요.”
한 교수가 말하는 ‘세종 스타일’이란, 먼저 토론과 여론을 존중하는 소통정치다. 세종의 통치는 ‘군신공치(君臣共治)’의 전범이라 할 수 있다. 세종은 무한권력을 발동할 수 있는 군주지만, 의정부와 육조 대신이 여는 합동회의의 사회자로 머무르고자 했다. 소통의 테크닉이 절묘했다.
“상대의 발언을 묵살하는 법이 없어요. 대신이 말하면 일단 ‘네 말이 옳다’며 기를 꺾지 않고 존중하며 의견을 말하도록 이끌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죠. 만약 대통령이 면전에서 핀잔을 하면 누가 직언하겠어요. 세종은 그걸 아는 겁니다.”
찬반이 엇갈려도 숫자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반대 의견을 보완하며 “실록을 읽다 보면 답답증이 날 정도”로 회의를 했다. “그러니까 신하들이 뒷말이 없고, 정책에 자신도 참여했다는 책임의식이 커지지요. 세종 재위 33년간 반역으로 죽은 이가 없습니다. 대화와 소통으로 합의를 이끌어내는 정치를 한 덕입니다.”
신하뿐 아니라 백성들의 의견도 존중했다. 조세제도인 ‘공법(貢法)’을 만들 때는 시안을 만들고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전국 17만 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다. 사실상 우리나라 최초의 국민투표라 볼 수 있다. 조사 결과 찬성이 많았는데도 바로 실시하지 않았다. 일부 지역에서 먼저 시험하고 반대론자가 제기한 문제를 수정 보완해 14년 뒤 최종 결정했다. 이렇게 만든 ‘전분6등 연분9등’의 공법은 이후 수백 년간 이어졌다.
적지 않은 반대에도 새 제도를 덜컥 시행해놓고 예상됐던 부작용은 감추려 안달하고, 집권 뒤 상대 당파 숙청을 반복하는 오늘날 정치는 세종 대보다 후퇴한 셈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의사결정에 토론이 제대로 이뤄집니까? 숫자로 밀어붙이고 국회가 의결하면 끝나지요. 반대파는 물리력으로 막으려 하고. 이게 뭡니까.”
반면 나라의 백년대계는 일시적인 원망이 있더라도 꾸준히 밀고 나갔다. 대표적인 게 충청 경상 전라 등 ‘하삼도(下三道)’ 주민의 북방 이주정책이다. 4진을 새로 설치한 함길도는 야인의 침략 등으로 인구가 적은데, 하삼도는 인구가 조밀하고 향리(鄕吏)의 횡포도 적지 않았다. 주요 이주 대상은 경제력이 있는 향리층이었다. 그러나 정책에 반발한 백성이 스스로 손을 자르거나 목숨을 끊는 일까지 벌어졌다. 세종은 “내 마음이 매우 괴롭다”면서도 “임금이 백성의 원망을 피하기만 하고, 장래를 생각지 아니하여 한갓 세월만 허비한다면…”이라며 이주정책을 그만둘 수 없다고 했다. 한 교수는 “세종의 사민(徙民)과 사군육진 개척이 없었다면 오늘날 대동강-원산 북쪽은 중국 땅이었을 것”이라며 “세종은 국토의 균형발전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봤다”고 말했다.
세종은 ‘외교의 대가’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게 대명 사대외교로 북방영토 회복을 뒷받침한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군육진 개척은 당시 당당한 명나라 백성이었던 여진족을 토벌했던 겁니다. 여진족은 명 황제에게 조선이 괴롭힌다고 호소하지요. 명은 조선이 명나라 땅을 침략한 거라고 볼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사대에 충실하고, 두만강 이북 700리까지는 조선의 땅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하면서 명의 간섭을 막았던 겁니다.”
개방적 인사정책으로 ‘흙수저의 전성시대’를 만들기도 했다. 관노비 출신으로 종3품 벼슬을 한 장영실뿐이 아니다. 24년간 정승을 지낸 황희는 서얼 출신이었고, 성균관 사성(司成)이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다. 무당의 자식이 집현전 학사가 됐고, 아전이 종2품에 올랐으며, 노비 출신이 형조참판을 지내고, 궁궐 춤꾼의 자식이 문과에 급제하기도 했다.
“유소년 시절 왕자 충녕(세종)을 가르친 이들의 지위가 낮았던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한 교수는 분석했다. 세종을 가르친 이로는 이수(1373∼1430)와 김토가 꼽힌다. 김토는 생몰연도, 본관도 모른다. 문과에 급제한 적도 없는 의관 출신이었다. 역시 평민 출신으로 보이는 황해도 봉산 사람 이수는 나중에 봉산 이씨의 시조가 됐다. 한마디로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는 얘기다.
한 교수는 “세종처럼 노비의 인권을 보호한 임금이 없다”며 “신하들의 주장을 따랐다가, 나중에 다시 아버지 신분을 따라 양인이 되는 ‘종부법’으로 바꿨다. 세종이 노비 수를 늘렸다는 주장은 사료를 제대로 보지 않아 생긴 오해”라고 말했다.
세종도 끝까지 완벽하지는 못했다. 말년에 다섯째와 일곱째 아들, 왕비 소헌왕후를 잇달아 먼저 떠나보낸 뒤에는 매우 불행했다. 불사를 반대하는 신하들을 두고 ‘쓸모없는 유자(儒者)’라고 부르며 멸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상태를 알고 스스로 부끄럽게 여겼다는 것이 세종의 비범함이었다. 재위 31년 1월에는 세종이 대신들에게 자신의 상태를 이렇게 털어놨다. “내가 기뻐하고 노여워함이…요즘에는 공사(公事)한 사이에도 발작하기를 무상하게 하고…만약 한두 해가 지나면 정신이 어두워져서 전연 모를 것으로 생각한다. 경들은 알고 있으라.”
한 교수는 “세종의 명언처럼 ‘신당기로 이일유후(身當其勞 以逸遺後·내가 고통스러운 일을 감당해 뒷사람에게 편안함을 줌)하는 정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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