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80화> 평북 정주
민족 분단의 상징인 휴전선을 가로질러 흐르는 한탄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정주동산. 경기 연천군 청산면 장탄리에 위치한 이곳을 이달 7일 찾았다. 차량 내비게이션의 도움 없이는 찾기 힘든 정주동산 입구에는 높이 3.5m의 탑 3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3·1운동을 이끈 33인 민족대표 가운데 3명의 추모비다. ‘겨레의 스승 남강 이승훈 선생’, ‘순국선열 순교자 일재 김병조 선생’, ‘애국선열 춘헌 이명룡 선생’이 그 주인공들.
정주동산은 평안북도 정주 출신 실향민들이 조성한 사설 공원묘지다. 기자를 안내한 최근 정주동산 이사장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북한과 마주한 이곳에 묘지공원을 조성한 뒤 정주가 고향인 민족대표 세 분을 기리는 추모비를 세우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제에 치열하게 맞섰던 정주 3·1운동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매년 3월 1일 정주 출신들은 이곳에서 기념행사를 연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정주지역 출신들의 항일과 독립 정신은 남달랐다. 1900년대 초부터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에 대항해 의병활동과 국채보상운동 등을 활발히 전개했고,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한 직후인 1911년 발생한 ‘105인 사건’(데라우치 총독 암살 사건)에서도 선천 다음으로 많은 34명의 기소자(전체 123명)를 냈다. 정주의 만세운동은 그 정점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 만세운동의 점화
정주의 만세운동은 3·1운동 첫날에 시작되지 못했다. 바로 이웃한 평북 의주와 선천 등지에서는 3월 1일 만세운동이 펼쳐졌지만 정주는 일제 군경의 사전 단속에 막혔기 때문이다.(‘조선소요사건일람표’, 1919년 4월 30일 작성) 하지만 늦게 점화된 정주의 만세운동은 다른 지역들보다 훨씬 치열했다. 3, 4월에 모두 14차례에 걸쳐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많은 희생자를 냈다.
공식적인 정주의 첫 만세운동은 3월 5일 정주읍에서 일어났다. 이날 오후 1시 30분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이 연합해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를 부르며 읍내를 돌다가 해산했다. 아쉽게도 이날 시위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한국민족운동사료·3·1운동편’)
만세운동이 점화된 뒤 이를 확산시키려는 민족운동 세력과 진압하려는 일제 관헌들 간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졌다. 3월 6일 오산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사용할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보관하다 일본 군경에 발각돼 구속됐고, 곽산면의 미곡상(米穀商) 김성근이 ‘불온문서’(독립선언서) 70장을 곽산면 시장 점포들에 배포했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대규모 만세운동이 꽃을 피운 곳은 곽산면 곽산읍이다. 3월 6일 오후 2시 강훈채(사립 영창학교 교사) 등이 이끄는 254명의 영창학교 학생과 100여 명의 주민이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기를 앞세우며 곽산 읍내로 진출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천도교인과 기독교인 등이 가세했고, 시위대 규모는 삽시간에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천도교 곽산교구장인 김경함이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한 뒤 시위대는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읍내를 누비고 다녔다. 이에 자극받은 공립보통학교 학생들도 만세운동에 가세했다. 이들은 일제 관사나 학교 담장, 처마 등에 태극기를 꽂았다.
이날 시위는 오후 4시까지 계속됐다. 시간이 갈수록 시위대 규모가 커지고 열기가 뜨거워지자 일제는 진압을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남녀 14명이 체포됐다. 경찰보조원이 당시 50세가 넘은 박지협을 때려 숨지게 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후 정주지역의 만세운동은 한동안 소강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물밑 작업은 계속되고 있었다. 정주에서 동학 대접주를 지냈던 천도교인 김진팔과 정주 교구장 최석일, 곽산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곽산 교구장 김경함 등은 3월 31일 정주 장날을 이용해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교구직원 대신 일반 신자였던 김석보, 김공선, 방열경 등 세 사람에게 연락과 군중 동원 책임을 맡기며 거사 준비를 진행했다.
○ ‘굴목대장’ 김석보
김석보는 이 과정에서 ‘굴목대장(掘目大將)’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당시 40대로 기골이 장대했던 김석보가 서면과 해산면 교인들에게 거사 계획을 알려준 뒤 읍내로 돌아오던 중 일제 헌병의 검문에 걸렸다. 조선인 헌병보조원이 김석보의 솜바지 속에서 독립선언서 1장을 발견하고 그를 체포하려 했다. 김석보는 “같은 동포끼리 왜 이러느냐”며 풀어줄 것을 사정했지만 통하지 않자 주먹으로 얼굴을 휘갈긴 뒤 눈알을 뽑았다. 그는 이어 “너는 일본의 사냥개가 아니냐. 나는 사람의 눈알을 뽑은 것이 아니고 개의 눈알을 뽑은 것이다”라고 호통을 쳤다. 나중에 이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눈알을 뽑은 대장부라는 뜻에서 그를 ‘굴목대장’으로 불렀다.(김석보의 증언, ‘정주군지’)
거사일인 3월 31일 정주읍 장날이 되자 인근 지역 주민들이 정주읍성 동·서·남문 등을 이용해 몰려들었다. 한곳에 모인 시위대는 오후 1시 30분부터 읍내 진출을 시도했다. 이들의 만세 함성은 양고(洋鼓), 나팔소리 등과 어울려 천지를 진동시켰다. 읍내의 주민 100여 명도 이에 호응했다. 이때 모여든 군중 수는 무려 2만5000명이 넘었다. 하지만 일제는 3500여 명으로 축소해 기록했다.
당시는 일제가 보병 77연대 소속 군인들을 앞세워 평안도 곳곳에서 민간인들을 상대로 잔인한 살육을 감행했다는 흉흉한 소식이 전해진 뒤였다. 이에 시위대는 ‘대한국독립단’ 기를 앞세우고 도끼와 낫 등을 들고서 만세를 외치며 정주읍내로 진입했다. 목숨을 내건 셈이었다.
시위는 격렬하게 진행됐다. 일본인 거리이던 정주 우편국 앞에 독립선언서가 뿌려지고 독립만세 함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일제 헌병의 저지에 맞서 군중은 투석으로 저항했다. 충돌은 군청에서도 발생했다. 헌병대는 일본인 민간 소방대의 지원을 받으며 실탄 사격까지 감행하며 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일제 헌병은 선두에서 태극기를 높이 흔들고 만세를 외치던 최석일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태극기를 쥐고 있던 그의 오른팔이 잘려 나갔다. 최석일은 떨어진 태극기를 왼손으로 주워 들고 다시 만세를 불렀다. 헌병은 왼팔마저 칼로 내리쳤다. 최석일은 양팔을 다 잃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에 일제 헌병은 그의 목을 향해 칼날을 드밀었고, 최석일은 현장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바로 뒤에 서서 행진하던 김사걸이 이 광경을 목격했다. 김사걸은 최석일이 떨어뜨린 태극기를 주워 들고 다시 앞장서 나아갔다. 헌병 보조원이 쇠갈고리를 들고 달려들어 그의 배를 찌른 뒤 끌고 다녔고, 일제 헌병은 그를 향해 총탄을 발사했다. 김사걸도 그 자리에서 순국했다.
무차별 진압에 정주읍 시가는 붉은 피로 물들었고, 이 과정에서 28명이 사망하고 99명이 부상을 입었다. 모씨 일가족(모신녀·모원봉·모원빈) 세 명도 현장에서 숨졌다. 당시 정주 사람들은 시산혈해(屍山血海·시신이 산을 이루고, 피가 바다를 이루다) 광경을 보고, 조선시대 ‘홍경래의 난’ 이후 가장 많은 인명이 희생됐다고 말했다.(‘정주군지’)
비슷한 시각 동주면 삼리에서도 시위가 있었다. 천도교인 박일경 등의 주도로 600여 명의 군중이 면사무소를 습격했다. 시위대는 면 서기와 직원 2명에게 만세를 부르게 하고, 면사무소에 비치된 각종 문서와 기구를 불태워버렸다. 이후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는 총격을 앞세워 시위를 탄압했다. 이때 동원된 일제 소방대원들은 들개를 때려잡을 때 사용하는 쇠갈고리를 휘둘러 수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했고, 일제 엽총사냥꾼들은 정주읍을 향해 오는 시위대를 향해 짐승을 사냥하듯 사격을 했다. 거리가 피바다를 이룰 정도로 시위대의 피해는 막심했다. 일제의 발포로 모두 12명이 현장에서 순국했다.(독립신문, ‘정주군 독립운동실기’ 1921년 3월 26일자)
격렬한 만세운동 이후 일제는 학교, 교회 등을 불태우며 보복을 단행했다. 일제 헌병들은 4월 2일 새벽 천도교 정주교구 24칸 건물에 불을 질러 전소시켰다. 그날 밤에는 용동 오산학교와 기숙사, 용동교회 등에도 불을 놓았다. 4월 10일 오전 6시경에는 읍내 기독교 정주교회당을, 25일에는 곽산교회당을 불태워버렸다. 일제는 방화 사건들이 모두 3·1운동을 반대하는 조선인이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는 거짓 보고와 함께 사건 자체를 덮어버렸다.
▼ 항일로 이름난 오산학교 일제가 불태워… “재건하라” 전국서 성금 ▼
이승훈, 안창호 만난뒤 학교 설립… 정주 만세운동과 운명 함께해
일제는 정주 3·1만세운동의 배후로 오산학교를 지목하고 학교를 불태워버렸다. 실제로 오산학교는 정주의 만세운동과 운명을 함께했다. 1919년 3월 2일 오산학교 교사 박기준과 심재덕이 학생 및 기독교인 80여 명을 모아놓고 만세운동 참여를 독려했고, 만세운동 기간에 학생들은 독립선언서 제작과 배포 등에 앞장섰다. 만세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3월 31일에는 정주읍 시위와는 별도로 갈산면에 위치한 오산학교 교직원과 용동교회 신도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고읍역까지 진출하며 만세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처럼 뜨거웠던 오산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만세운동은 학교의 설립 배경과 깊은 관련이 있다. 오산학교는 1907년 12월 민족대표 33인 중 핵심 인물인 이승훈이 도산 안창호를 만난 뒤 본격적으로 교육사업에 뛰어들면서 세운 곳이다. 민족교육을 목표로 설립된 학교였기에 일본어가 국어(國語)로 인정받던 일제강점기에도 학생들은 한국어와 한국사를 배웠다. 그 결과 학생 대부분이 일본어를 잘 할 줄 몰랐다.(두고 온 모교, 정주 오산학교·‘북한(1975년 6월호)’)
학교를 이끌어간 인물들도 쟁쟁하다. 조만식 류영모 홍명희 김성환 주기용 등 당대의 명망가들이 교장을 맡았고, 여준 서진순 이광수 염상섭 김억 이상정 진연근 이윤재 등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학생들을 지도했다.
‘전국적으로 항일학교로 이름난 오산학교가 일제에 의해 전소되자 학교 재건을 위한 성금이 모아졌다’는 동아일보의 기사(1920년 9월 1일자)도 있다. 동아일보는 ‘오산교의 서광’이란 제목으로 “정주 오산학교에서 만세 소요 때에 교실이 불에 타고 교사들도 체포를 당한 사람이 많이 있어 일시 동안은 상학을 중지하였다가 유지인사 김기종 씨가 일만 원을 기부하고 동교 졸업생 편에서 일만 원과 학부형 편에서 일만 원을 기부하여 동교는 일칭 더 충실하게 되어는 가는 중이며, 이 소식에 여러 인사들이 기부에 동참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1923년 각지의 성금으로 다시 세워진 오산학교는 남북 분단 후 서울 용산구 보광동의 오산고등학교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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