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라리는 지난 몇 년 사이에 기존 모델의 세대 교체는 물론 새로운 모델 출시에 여념이 없었다. 올해도 몇 가지 눈에 띄는 모델을 선보였다. 대미를 장식한 것이 최근 공개한 ‘로마(Roma)’다.
로마는 옛 스포츠카들로부터 이어져온 롱 노즈 숏 데크(보닛이 길고 트렁크가 짧은) 스타일을 지닌 2도어 쿠페다. 차체 앞쪽에 있는 최신 V8 엔진에서 나온 동력으로 뒷바퀴를 굴리는 기계적 배치를 갖췄다. 페라리 V8 엔진 모델은 주로 엔진을 차체 뒤쪽에 놓는 리어 미드십 배치나 지붕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컨버터블 형태였다. 그런 점에서 로마는 최근 페라리 가운데서도 이례적인 형태의 차라고 할 수 있다.
로마의 또 다른 특이한 점은 바로 도시 이름을 따서 모델 이름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이다. 페라리는 로마를 ‘1950∼60년대 로마의 자유분방하고 즐거운 삶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차라고 이야기한다. 로마는 이탈리아의 수도이면서 옛 유적을 비롯해 문화와 예술의 분위기가 가득한 도시로 잘 알려져 있다. 아마도 나이 지긋한 독자라면 배우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펙이 출연한 영화 ‘로마의 휴일’을 기억할 것이다. 영화에 담긴 1950년대 로마의 모습과 분위기가 떠오른다면 페라리가 로마에 담으려 한 멋과 낭만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차 이름에 도시나 지역의 이름을 가져다 쓴 예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 지역의 특색과 분위기가 차의 성격과 잘 맞아떨어지거나, 소비자들이 차를 보고 경험하면서 그 지역의 분위기를 떠올리길 바라는 것이다.
페라리도 로마에 앞서 내놓은 여러 차의 이름을 그런 식으로 지은 바 있다. 2017년에 선보인 ‘포르토피노(Portofino)’나 포르토피노의 선대 모델인 ‘캘리포니아(California)’는 아름다운 바닷가 풍경과 자유로운 분위기로 예술가들이 즐겨 찾는 이탈리아 마을과 미국의 주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페라리가 내놓은 두 모델 모두 그 이름처럼 지붕을 열고 편안히 바람을 즐길 수 있는 성격의 차를 지향했다. 1950∼60년대는 여러 모델에 아메리카와 유로파라는 이름도 썼다. 이런 이름들은 대개 차의 특징을 나타내는 세 자리 숫자 뒤에 더해져 해당 지역 소비자 취향에 맞춰 만들어졌음을 나타냈다.
물론 페라리는 고성능 스포츠카를 전문으로 만드는 데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만큼, 자부심을 상징할 만한 도시나 지역 이름을 쓰기도 한다. 예를 들어 1990∼2000년대에 나온 ‘360 모데나(Modena)’는 창업자 엔초 페라리가 태어난 도시, ‘550 마라넬로(Maranello)’는 페라리 본사가 자리잡고 있는 도시, ‘599 피오라노(Fiorano)’는 페라리의 주행시험용 트랙이 있는 마을 이름이다. 페라리의 자부심 표현의 정점은 2010년에 선보인 ‘458 이탈리아(Italia)’다. 자신이 속한 나라 이름을 차에 쓸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런 것이 받아들여지는 나라인 이탈리아도 대단하지 않은가?
지금은 모터스포츠와 거리를 두고 있지만, 주요 자동차 경주에서 왕성하게 활약했던 마세라티 차들에도 자동차 경주의 성지라고 불리는 서킷이 있는 도시 이름이 종종 쓰였다. 대표적인 것이 ‘세브링(Sebring)’과 ‘키알라미(Kyalami)’다. 각각 미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도시 이름이자 마세라티 경주차가 우승 기록을 세운 곳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것은 마세라티도 페라리처럼 나라 이름을 가져다 쓴 모델이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1966년에 선보인 멕시코가 그 주인공이다. 이 모델 이름의 유래도 앞서 이야기한 두 모델과 비슷하다. 1966년 멕시코에서 열린 그랑프리 대회에서 마세라티 경주차가 우승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여기에 전 멕시코 대통령이 이 모델의 첫 차를 산 것도 그런 이름이 붙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르망 24시간 경주를 여러 차례 제패했던 벤틀리는 그동안 내놓은 여러 모델에서 르망과의 관계를 강조했다. 1920∼30년대 르망 경주 우승을 이끌었던 젠틀맨 드라이버의 표본인 ‘벤틀리 보이즈’의 이미지를 이어 나가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그런 의도는 모델 이름에도 곧잘 반영되곤 한다. 현재 벤틀리가 내놓고 있는 모델 중 가장 크고 고급스러운 세단인 ‘뮬잔(Mulsanne)’이 대표적이다.
뮬잔은 프랑스 르망 지역에 있는 작은 마을의 이름이다. 이 마을 이름이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르망 경주가 열리는 사르트(Sarthe) 서킷의 특성 때문이다. 사르트 서킷은 평소에는 여러 마을과 마을을 잇는 일반 도로로 쓰이다가, 경주가 열릴 때에만 부분적으로 교통을 통제해 경주 전용으로 활용한다. 그렇게 해서 한 바퀴가 13km가 넘는 대규모 서킷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사르트 서킷의 절반 정도 되는 지점에서 반환점 역할을 하는 곳은 전체 코스의 동남쪽 끝에 있는 커브인데, 그 커브가 걸쳐 있는 마을이 바로 뮬잔이다. 커브 직전에 있는 직선 구간은 뮬잔 스트레이트(Straight)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추월 경쟁이 벌어지며 극적인 순간이 자주 연출되곤 한다. 르망 경주와의 연관성을 표현하기에 이처럼 좋은 이름도 드물다.
이런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 판매했던 ‘아나지(Arnage)’ 역시 르망 경주 코스의 상징적 커브를 가리키면서 그 커브가 있는 마을의 이름이기도 하다. 심지어 벤틀리는 뮬잔 커브를 향해 이어지는 약 6km 길이의 긴 직선 구간을 가리키는 ‘유노디에르(Hunaudieres)’도 1999년에 내놓은 콘셉트카의 이름으로 쓴 바 있다.
르망과는 관계가 없지만 1990년대와 2000년대 후반에 내놓은 ‘브루클랜즈(Brooklands)’는 1907년에 세계 최초의 자동차 경주 트랙으로 문을 연 영국의 서킷 이름에서 딴 것이다. 물론 이곳도 1920년대와 30년대 벤틀리가 경주에 출전해 많은 기록을 남긴 곳이어서 벤틀리에게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
무형의 현상이나 신비로운 존재의 이름을 즐겨 쓰는 롤스로이스도 이따금 이런 식으로 이름을 짓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이 코너에서도 소개했던 ‘커니시(Corniche)’다. 모나코 주변 프렌치 리비에라의 지중해를 끼고 지나는 해안도로를 가리키는 말이다. 롤스로이스 컨버터블의 호화로운 분위기를 만끽하기에 더없이 좋은 길이라는 뜻일 것이다. 롤스로이스 역사에서 가장 특이한 차로 손꼽히는 ‘카마르그(Camargue)’도 비슷한 예다. 1975년부터 1986년까지 생산된 이 차는 롤스로이스가 만든 차 중에서도 드물게 이탈리아 카로체리아인 피닌파리나가 디자인했다. 주로 영국 코치빌더들이 디자인하고 만들었던 이전 롤스로이스 차들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카마르그라는 이름도 범상치 않은데 이는 프랑스 론 강과 지중해가 만나는 삼각주 지역의 습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수백 종의 조류가 서식한다는 이곳은 날씨에 따라 신비로운 풍경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지역 이름을 쓰면서도 다른 모델과 공통점이 있는 것을 찾아 일관성을 유지한 것을 보면, 카마르그가 아무리 독특해도 롤스로이스 혈통이라는 점은 분명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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