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네이딘 버크 해리스 지음·정지인 옮김/448쪽·1만9800원·심심
#1. 한 여성이 천식이 심한 7세 딸을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 딸은 반려동물의 털, 바퀴벌레, 독한 세제 등 천식을 유발하는 어떤 외부 요인에도 노출되지 않았다. 약물치료를 병행했지만 병세는 차도가 없었다. 뚜렷한 원인을 찾지 못하던 의사는 어느 날 소녀의 어머니로부터 뜻밖의 얘기를 듣는다. “애 아빠가 주먹으로 벽을 칠 때마다 천식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아요.”
#2. 주말마다 등산, 자전거를 즐길 정도로 건강했던 43세 남성. 자다가 갑작스레 몸이 마비돼 응급실에 실려 간 그는 뇌졸중 진단을 받는다. 평소 검진에서 ‘비흡연자, 뇌졸중 위험요인 없음’ 같은 정상 결과를 받아왔던 그는, 치료 과정에서 가족조차 모르던 유년기 트라우마를 털어놓는다.
어린 시절 겪은 마음의 상처가 평생 몸에도 새겨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유년기 스트레스는 신경계, 면역계, 호르몬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올해 초 미국 캘리포니아주 공중보건국장으로 부임해 주민의 스트레스 치유·예방 정책에 힘을 쏟고 있는 저자는 수많은 환자의 차트 뒤에 감춰진 유년기 트라우마에 주목했다. 특히 소아과 의사, 공중보건의로 일할 당시 만난 수많은 환자의 데이터와 사례를 차근히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내며 유년기 스트레스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의사생활 내내 그는 트라우마와 질병 사이에 어떤 보이지 않는 끈이 있음을 확신했으나 마땅한 근거를 찾진 못했다. 그러다가 1998년 발견한 ‘ACE 연구(the Adverse Childhood Experiences study)’ 논문은 그에게 커다란 실마리를 제공했다. 1만7000여 명의 임상 데이터에는 아동기 경험을 묻는 10가지 항목(학대, 방임, 가정 내 약물 남용, 정신질환, 어머니의 폭력 피해, 부모의 이혼 또는 별거, 가정 내 범죄 등)을 분석한 환자의 ‘ACE지수’ 통계가 담겨 있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ACE지수가 4점 이상이면 0점인 사람에 비해 심장병과 암에 걸릴 가능성이 2배 높다. 만성폐쇄성 폐질환은 3.5배나 많았다. 뇌졸중 발병 가능성은 2.4배 높은 것으로 조사됐으며, 기대수명이 20년가량 짧을 수 있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저자는 “일반적 건강검진 절차에 ‘ACE지수 검사’가 포함됐더라면 더 많은 환자의 질병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앞선 연구에서 강력한 실마리를 얻은 그의 여정은 결국 ‘예방’으로 향한다. 그는 후반부에 ‘ACE 검사’가 일상적으로 시행되는 2040년 미래상을 묘사했다. 학교, 병원, 가정 등에서 ACE 검사는 일종의 예방접종처럼 자리 잡아 주민의 정신·신체 면역 증진에 큰 기반이 된다.
물론 여전히 의학계에서 그의 논리는 ‘100% 옳다’고 받아들여지진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도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는 대목이 없다고 말하긴 힘들다. 하지만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강조했다.
“프레임을 바꾸고 렌즈를 바꾸면 어느 순간 갑자기 감춰졌던 세계가 드러나 보이고, 그때부터는 모든 게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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