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그게 왔습니다. 그에게 주어졌던 모든 것을 훔치고 그가 발견했던 기쁨을 파괴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게 뭘까? 사람일까, 짐승일까? 영혼일까, 신일까?”(2권 117쪽)
나이지리아 양계장 집 아들로 태어난 치논소. ‘흙수저’인 자신과 달리 미모 지성 재력을 갖춘 은달리와 결혼을 꿈꾸며 유학길에 오른다. 하지만 전 재산을 털어 간 유학은 사기였고, 설상가상 살인 사건에 휘말려 철창에 갇힌다. 친구의 배신에 이어 살인 누명을 쓰게 된 순간 그는 ‘그것’의 그림자를 느끼고 몸을 떤다.
나이지리아 이보족이 신봉하는 ‘이보 우주론’의 도식, 발음하기 힘든 신의 이름, 모든 인간에게 깃든 수호령 ‘치’의 개념…. 첫인상은 생경한데 사랑으로 망한 한 많은 생을 다룬 줄거리는 익숙하다. 이른바 ‘막장 드라마’ 같다. 최근 국내 출간된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 1, 2’는 사랑이라는 이야기의 원형에 아프리카 문화를 얹어 비범함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나이지리아 작가 치고지에 오비오마(33·사진)는 데뷔작 ‘어부들’에 이어 이 작품으로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e메일로 만난 그는 “아프리카 이보족 사상인 이보론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자 친구가 겪은 아픔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난데없이 비극에 휘말리는 삶과 인간의 마음이 고장 나는 이유가 궁금해 써 내려갔다”고 했다.
“2009년 터키에 속한 북키프로스에서 유학하던 시절 친구가 다락방에서 몸을 던졌어요. 어떤 감정이 인간을 극단으로 이끄는 걸까…. 이후 인간 감정의 변화를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탐구를 통해 인간의 조건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치논소의 인생 여정은 ‘치’의 존재로 신화적 기운을 덧입었다. 700년간 환생을 거듭한 ‘치’는 주인을 여럿 바꿔가며 그들의 생을 보듬는다. “기대는 시간의 핏줄에 떨어진 악랄한 피 한 방울입니다”, “그런 애정은 영혼이 죽어가면서도 그 숨결로 열망하는 바이며, 그의 심장이 갇혀 있는 숭고한 지하 감옥입니다”…. 잠언 같은 ‘치’의 내레이션은 절망의 기본값에서 고군분투해온 인간 운명을 보여준다. 16세기와 현재를 넘나드는 주인들과의 일화는 모험담의 활기를 안긴다.
“치는 이보론 믿음의 중심이에요. 치를 통해 이보 문명의 지도를 그리는 한편 흑인 사회의 무의식적 열등감을 깨부수고 싶었습니다. 디아스포라를 포함한 아프리카 문제의 핵심은 우리에게도 뛰어난 사상과 체제가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 데서 출발한다고 보거든요.”
오비오마는 나이지리아 아쿠레에서 태어났다. 열 살 무렵부터 그리스 비극, 셰익스피어, 민족 신화를 탐독했다. 사춘기 시절 만난 토니 모리슨의 ‘블루스트 아이’는 충격적이었다. 검은 피부를 추악하다 여기며 셜리 템플처럼 ‘파란 눈’을 동경하던 열한 살 흑인 소녀의 이야기였다.
책장을 덮은 후 소년 오비오마는 “우리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깨치고 유산에 자부심을 가져야 다른 세계가 우리를 파괴할 수 없다”는 걸 절감했다. 키프로스, 터키를 거쳐 미국 내 주류 작가로 발돋움한 지금도 ‘무엇을 쓰는가’가 가장 중요하다는 걸 잘 안다.
“미국 생활이 올해로 7년째입니다. ‘나이지리아 출신’이라 불리며 미국의 사회적 담론과 정치, 나아가 미국에 대해 글을 쓰라는 압박을 슬슬 느끼고 있죠. 하지만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서구화로 아프리카가 변했고, 잃어버린 우리 문화를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형제가 많은 그는 ‘어부들’에서 형제 간 경쟁과 갈등을 들여다봤다. 차기작에서는 ‘어부들’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좀 더 밀어붙일 생각이다. 좋아하는 작가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존 밀턴, 셜리 해저드, 버지니아 울프, 살만 루슈디. “높이 날아올라 새로운 형태를 부여하는 문장을 쓰는 작가”들이란다. 한국 팬들에게 남긴 한마디는 이렇다.
“언젠가 한국인 여성과 사랑에 빠졌어요. 함께 서울로 이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결국 이별하게 됐지만요. 한국을 찾아 두 눈과 두 손으로 한국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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