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후 “단군을 국조로 모시자”… 민족 주체성 확립 등 결속 움직임
일제, 왜곡 통해 정신식민지 획책
‘단군은 우리 민족의 종조(宗祖)이시오, 우리 근역(槿域)에 건국하신 제일인(第一人)이시오, 가장 신성하신 대위인(大偉人)이시라.…(중략)…숭엄하신 단군존(檀君尊)○을 구하야 독자와 공히 배(拜)하려고 자(玆)에 본사는 현상(懸賞)하야 감히 존(尊)○○을 모집하오니 강호형제(江湖兄弟)는 응모하시오.’
1920년 4월 1일 창간한 동아일보사는 그해 4월 11일자에 ‘단군영정 현상모집(檀君影幀 懸賞募集)’이라는 제목으로 이런 내용의 사고를 실었다. 또 이 사고를 5월 말까지 한 달여 기간에 10여 차례에 걸쳐 게재하며 국민적인 동참을 호소했다.
‘한국의 단군 사묘’의 저자 윤한주 박사는 “3·1운동 이후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단군 영정을 모집하거나 단군 기원(紀元)을 사용하는 등 국조(國祖·나라의 조상)로 단군을 모시자는 인식이 온 국민에게 확산됐다”고 말했다.
일제의 눈을 피해 단군 사묘(祀廟·영정이나 위패 등을 모신 전각)에서 독립정신을 일깨우는 모임도 전국 곳곳에서 진행됐다. 윤한주 박사에 따르면 현재 전국에는 46곳의 단군 사묘가 설립돼 있다. 1910년 한일강제병탄 이후 설립돼 남아 있는 단군전으로는 충남 서산의 와우리 단군전(1913년)에 이어 곡성 단군전이 두 번째다.
당시에 단군 사묘 설립은 사대주의를 배격하고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독립운동의 하나로 해석됐다. 실제로 상당수 독립운동가들은 빼앗긴 조국을 되찾고자 노력하면서 단군을 정신적 기치(旗幟)로 삼는 일이 많았다. 이런 이유에서 중국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단군이 임금이 되어 나라를 세운 날인 개천절(10월 3일)을 ‘건국기원절’로 정해 기념식을 치르기도 했다(동아일보 1924년 11월 9일자).
반면 일제는 단군을 구심점으로 삼아 한민족이 결속되는 일을 두려워했다.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단군은 황당한 전설이라고 왜곡하기 시작했고, 단군 유적지를 파괴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일제는 이런 방식을 통해서라도 한국인의 정신까지 식민지화하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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