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백산을 어버이처럼 믿고 자금 도움 받아라”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21일 03시 00분


[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의령 출신 백산 안희제
민족교육운동-비밀결사 결성, 백산상회 만들어 독립자금 제공
1920년 동아일보 창립 발기인 참여… 언론 통해 항일운동 활발히 전개

백산기념관에 있는 백산의 흉상.
백산기념관에 있는 백산의 흉상.
경남 의령 출신인 백산(白山) 안희제(1885∼1943·건국훈장 독립장)는 백범(白凡) 김구, 백야(白冶) 김좌진과 더불어 삼백(三白)으로 불렸던 독립운동가다. 당초 고향에서 한학을 익히던 그는 나라가 망국의 위기에 처하자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상경한다.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한 뒤 양정의숙으로 전학한 백산은 1907∼1908년 구명학교 의신학교 창남학교를 설립하는 등 민족교육운동을 펼쳤다. 1909년에는 비밀결사 ‘대동청년단’을 결성했다.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안창호 이갑 신채호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만나 국권 회복 방안을 논의한다. 백산은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조직망과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의 연락망 구축의 필요성을 깨닫고 1914년 부산으로 돌아왔다.(‘독립운동 자금의 젖줄 안희제’)

백산이 부산에 설립한 백산상회는 임정에 자금을 제공하는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 1970년대 백산상회 터의 모습. 백산기념관 제공
백산이 부산에 설립한 백산상회는 임정에 자금을 제공하는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 1970년대 백산상회 터의 모습. 백산기념관 제공
백산은 고향의 논 2000마지기를 팔아 1914년 말 부산에 백산상회를 설립했다. 1919년에는 항일 성향의 영남지역 대지주들을 주주로 끌어들여 자본금 100만 원의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장했다. 백산상회는 상하이임시정부 등에 자금과 정보를 제공하는 국내 독립운동의 중요 거점 역할을 했기 때문에 수입보다 지출이 많았다. 주주들은 아무런 불평 없이 추가 불입으로 회사의 적자 위기를 막아줬다.(‘백산의 동지들’)

백산은 언론을 통한 항일운동에도 관심을 가져 1920년 동아일보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한 뒤 부산지국장으로 활동했다. 1926년에는 시대일보를 인수해 중외일보로 이름을 바꿔 발행하기도 했다.

임정 자금책이었던 백산은 일제의 눈을 속이기 위해 변장술에 능했다. 금테 안경에 일본 옷을 입고 다녔으며 일본인이 운영하는 고급 여관에 투숙했다. 술을 마실 때는 일본인 기생만 옆에 앉혀 의심을 피했다. 임정 요원과의 정보 연락을 위해 객실은 늘 36호실을 이용했다.(1975년 ‘나라사랑’ 19집―안희제 선생 특집호)

1939년 김구 주석의 밀명을 받고 국내로 잠입한, 임정 첩보 36호 요원 김형극은 ‘나라사랑’ 19집 기고에서 “김 주석은 자금 조달이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백산을 어버이처럼 믿고 만나 도움을 받으라고 했다”고 밝혔다.

대종교에 입교한 백산은 1933년 만주로 망명해 발해의 고도인 동경성에 발해농장과 발해학교를 세웠다. 대종교 총본산도 동경성으로 이동했다. 일제가 1942년 대종교 간부 체포령을 내리면서 체포된 백산은 혹독한 고문을 받고 1943년 8월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3시간 만에 숨졌다.

의령·부산=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독립운동#백산 안희제#김구#백산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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