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백제왕궁을 깔고 거대 사찰이 들어선 이유는?[김상운 기자의 발굴왕]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월 2일 14시 00분


‘백제왕궁 정원과 사찰 발굴’

※김상운 기자가 진행하는 고고학 유튜브 채널 ‘발굴왕’에서 흥미로운 고고학 이야기들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익산 왕궁리 유적은 백제왕궁과 사찰이 공존하고 있는 독특한 유적입니다. 축구장 20배 크기(21만 m²)의 부지에 홀로 우뚝 솟은 오층석탑(국보 제289호)이 멀리서도 보입니다. 석탑 주변엔 1400년 전 궁궐터와 절터 흔적을 보여주는 초석과 적심(積心·기둥을 올리기 위해 밑바닥에 까는 돌)이 숱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최맹식 전 소장이 왕궁리 유적 내 ‘왕궁 정원 터’를 둘러보고 있다. 직사각형 돌이 석축 수조로, 조경용 괴석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이곳에 고였다.
최맹식 전 소장이 왕궁리 유적 내 ‘왕궁 정원 터’를 둘러보고 있다. 직사각형 돌이 석축 수조로, 조경용 괴석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이곳에 고였다.


이곳을 발굴한 최맹식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과 이주헌 연구기획과장, 전용호 학예연구관과 함께 석탑과 금당, 강당을 거쳐 후원(後苑)을 답사했습니다. 사찰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옛 백제의 화려한 왕궁 정원이 펼쳐졌습니다. 얕은 구릉의 정원 터에서는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괴석들이 눈길을 끕니다. 물길을 따라가자 직사각형 모양의 석축 수조가 나옵니다. 졸졸 흐르는 물이 괴석을 지나 수조에 넘쳐흐르는 풍경은 상상만으로도 운치를 더합니다. 최맹식 전 소장은 “1992년 3월 왕궁리 유적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만 해도 왕궁 정원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왕궁 정원 터에서 발견된 아름다운 무늬의 조경석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왕궁 정원 터에서 발견된 아름다운 무늬의 조경석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백제왕궁 위에 지어진 사찰

왕궁리는 1989년부터 현재까지 30년 동안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우리나라 최장 발굴 유적입니다. 20년 넘게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부여 부소산성보다 긴 기간이죠. 초기 발굴단 규모는 학예직 조사원 40명과 인부를 포함해 약 100명에 달했습니다. 그만큼 규모가 큰 데다 백제역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도 지대합니다. 오랫동안 발굴된 유적답게 그 해석도 시대에 따라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발굴 초엔 유일하게 남은 지상 건조물인 오층석탑의 영향으로 사찰 중심으로 조사가 이뤄졌습니다. 왕궁리가 백제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遷都)를 단행한 증거라는 시각도 있었지만 소수설에 불과했습니다. 오히려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익산에 세운 보덕국 터라는 의견이 우세했죠. 이런 가운데 인근 익산 미륵사지 발굴조사 지도위원이던 김삼용 원광대 교수가 왕궁리와 미륵사지 모두 관세음응험기에 적혀있는 익산 천도의 근거라는 주장을 내놓았습니다.

왕궁리 오층석탑과 주변 건물터 유구의 모습. 문화재청 제공
왕궁리 오층석탑과 주변 건물터 유구의 모습. 문화재청 제공


일본 교토 쇼렌인(靑蓮院) 사찰이 소장한 관세음응험기에는 ‘639년 백제 무광왕(武廣王·무왕)이 수도를 지모밀(枳慕蜜·익산)로 옮겼다’는 기록이 적혀있습니다. 김 교수는 진실을 밝히려면 왕궁리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에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만들어지기 1년 전인 1989년 윤근일 학예연구사를 왕궁리에 파견했습니다. 3년 뒤인 1992년 최맹식 전 소장이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으로 부임하면서 왕궁리 발굴을 총괄했습니다. 당시 최 전 소장을 발굴단장으로 김선태 김용민 당시 학예연구관과 김영철 지병목 학예연구사가 조사원으로 참여했습니다.

왕궁리에 사찰이 들어서기 전 백제 왕궁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결정적인 계기는 1993년 8월 최 전 소장의 목탑 터 발견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사찰과 더불어 백제시대 담장만 확인돼 유적의 성격이 사찰인지 왕궁인지 모호했죠. 최 전 소장은 당시 오층석탑 동쪽, 지표로부터 1m 깊이에서 목탑을 올리기 위해 목봉(木棒)으로 땅을 다진 흔적을 찾아냈습니다. 달구질 흔적이 발굴과정에서 확인된 것도 이때가 처음입니다.

백제시대 당시 왕궁리 유적의 왕궁 정원을 상상으로 복원한 모습.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백제시대 당시 왕궁리 유적의 왕궁 정원을 상상으로 복원한 모습.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이어 목탑 터 아래에서 백제시대 왕궁 건물 터를 추가로 발견했습니다. 왕궁을 지은 뒤 어느 순간 이를 폐기하고 목탑을 올렸다가 또 다시 이를 허물고 석탑을 지었다는 얘기였죠. 결국 백제시대 담장은 궁장(宮墻·궁궐을 둘러싼 담장)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인데, 이 부근에서는 통일신라 유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궁장의 가로와 세로비율이 2대 1인 것은 동시대 중국 북제의 도읍이었던 업성(¤城·현 허베이성 한단시)을 참고한 것으로 보입니다. 최 전 소장은 “왕궁 건물 터를 파괴하고 중심부에 목탑과 금당이 들어선 걸 감안하면 통일신라시대 이후 사찰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오층석탑 동쪽 30m 지점에서 통일신라시대 기와 가마터가 나왔습니다.

왕궁리 유적에서 발견된 수세식 공중화장실 유구.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왕궁리 유적에서 발견된 수세식 공중화장실 유구.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왕궁리 유적에서 궁장과 더불어 2000년대 이후 대형 정전(正殿) 터와 문지(門址), 정원, 공방, 수세식 화장실이 잇달아 발굴됨에 따라 백제 왕궁이 조성된 사실은 점차 굳어지게 됐습니다. 특히 화장실이나 공방과 같은 생활유적이 확인된 것은 이곳이 단순한 행궁(行宮)에 그치지 않았음을 시사합니다. 이밖에 중국 북제에서 제작한 고급 청자조각과 더불어 부소산성 유물에 필적하는 높은 수준의 기와, 자기, 토기가 출토된 것도 왕궁리의 성격을 뒷받침합니다. 특히 ‘首府(수부)’라고 새겨진 기와가 1980년 부소산성에 이어 2000년 왕궁리 유적에서도 출토됐습니다. 최 전 소장은 “수부기와는 왕성 터로서 왕궁리 유적의 차별성을 보여준다”고 말했습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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