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를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열녀(烈女)라고 칭하면서 단지 지아비를 위하여 절개를 수립한 이만을 기재했다. 이제 열녀(列女)로 고치고 무릇 절의와 덕행이 있는 부인을 모두 기재했다.”
반계 유형원(1622∼1673)이 실학사상을 담아 최초의 사찬(私撰) 전국지리지인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를 쓰며 범례에 적은 글이다. 불 화(화) 받침이 있고 없고의 차이지만, 두 열녀의 차이는 작지 않다. 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烈女’는 “남편이 죽은 후에 수절하거나 위난 시 죽음으로 정절을 지킨 여성”. 그러나 ‘列女’는 여러 여성의 전기를 늘어놨다는 뜻이다. 굳이 표기를 바꾼 유형원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은 17세기를 대표하는 역사지리서 ‘동국여지지’를 처음으로 최근 번역 출간했다. 유형원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증보 편찬)에는 안 나오지만 업적이 있는 여성의 이야기를 실제로 책에 담았다. 한양을 다룬 1권 경도(京都)의 ‘열녀’에서는 실꾸리를 삼킨 원자(元子·아직 세자에 책봉되지 않은 임금의 맏아들)의 목숨을 구한 성종 때 여성 안(安) 씨를 소개하기도 했다.
유형원은 앞선 저술을 참고했을 뿐 아니라 실제 많은 지역을 답사한 결과를 책에 담았다. 그를 통해 앞선 지리지가 해산물을 산간지역 토산물로 기재하는 등의 오류를 다수 바로잡았다. 유형원은 그런 오류가 “각 관사의 공물안(貢物案)을 근거로 해 적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군현의 위치가 달라지면서 생긴 혼란은 실제 땅을 기준으로 바로잡았다. 같은 물길인데도 지역별로 달리 불렸던 것도 주요 하천의 이름으로 통일하기도 했다.
공동 번역자인 김성애 고전번역원 성과평가실장은 “호란을 겪은 영향으로 동국여지지는 북쪽 영토와 함경도 지역의 역사지리 인식이 두드러지고,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려는 노력이 많이 담겼다”면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규장각 소장본에서 경상좌도가 빠져 있는데 빨리 발견되기를 기다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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