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체적인 부처와 보살의 모습이 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성화(聖畵)처럼 보이기도 하는 경기 화성시 용주사 대웅전 후불탱(後佛幀). 서양화 기법이 활용돼 20세기 초 작품이라는 해석도 나온 이 이채로운 탱화가 1790년 단원 김홍도(1745~?) 등의 도화서 화원들이 주도해 그린 궁중회화의 걸작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강관식 한성대 예술학부 교수는 국립중앙박물관이 발간하는 학술지 ‘미술자료’ 최근호에 게재한 논문에서 “용주사 삼세불회도(三世佛會圖)는 김홍도 이명기 김득신 등 궁중화원 및 왕실과 가까운 화승(畵僧)들이 함께 정조(1752~1800) 대 발달했던 서양화법을 전면적으로 구사해 불화(佛畵) 사상 유례가 없는 새 양식을 창조한 것”이라고 밝혔다.
용주사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화성으로 옮긴 뒤 명복을 빌고자 세운 절이다. 삼세여래체탱(三世如來體幀)으로도 불리는 이 탱화는 화가 등을 기록한 화기(畵記)가 없는 탓에 제작 시기를 두고 논쟁이 이어져 왔다. 강 교수는 논문에서 ‘주상전하(정조) 수만세(壽萬歲), 자궁(慈宮)저하(혜경궁 홍씨) 수만세, 왕비전하(효의왕후) 수만세, 세자저하(나중의 순조) 수만세’라고 쓰인 그림 중앙의 축원문에 주목했다. 강 교수는 “위계상 아래인 자궁을 왕비보다 앞에 쓴 건 정조가 생전 지시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밝혔다.
더구나 강 교수가 이 불화를 적외선 촬영한 결과 축원문은 원래 ‘주상 왕비 세자’의 장수를 기원했다가 이를 덮은 뒤 고쳐 쓴 것으로 드러났다. 준공 다음 해인 1791년 1월 용주사에 들른 정조가 축원 문구를 보고 자신의 어머니를 넣으라고 지시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강 교수의 시각이다.
1800년까지는 순조가 세자 책봉 전인 원자(元子) 신분이었기에 제작 시기가 그 이후라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논문은 “‘한국의 불화’(전 40책)가 수록한 조선 불화의 축원문을 전수 조사한 결과 18세기에는 세자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의례적으로 주상 왕비 세자를 축원문에 넣었다”고 설명했다.
1825년 용주사 주지 등운은 ‘용주사사적기’에 이 그림을 김홍도가 그렸다고 적었다. 수원부 관청 기록에도 정조가 김홍도 등을 감동(監董)으로 임명해 불화 그리는 일을 관리하도록 했다고 나온다. 감동은 감독일 뿐 아니라 그림을 직접 그릴 수도 있는 직책이라고 한다.
강 교수는 “1789년 동지사로 연경에 갔던 김홍도와 이명기가 천주당의 성화를 보고 돌아와 서양식 명암법과 투시법을 전통 화법과 융합해 그렸던 것”이라며 “이들이 귀국도 하기 전 용주사 감동으로 임명된 점에서도 정조가 당대의 새로운 문화를 담아 사찰을 조성하고자 이들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지시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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