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독립운동가 “늙은이라고 뒷방신세로 있어선 안된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1일 03시 00분


[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90화> 러시아 下

우수리스크 한인들이 나무로 만든 ‘고려독립선언문’. 1923년 3월 1일 한인들은 독립문 지붕에 두 장의 태극기를 세우고 그 
아래 ‘삼일독립운동뎨사회기렴’(제4회 기념)이라는 간판 글씨를 부착한 뒤 성대한 행사를 열었다. 박환 제공
우수리스크 한인들이 나무로 만든 ‘고려독립선언문’. 1923년 3월 1일 한인들은 독립문 지붕에 두 장의 태극기를 세우고 그 아래 ‘삼일독립운동뎨사회기렴’(제4회 기념)이라는 간판 글씨를 부착한 뒤 성대한 행사를 열었다. 박환 제공
1919년 3월 26일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마을 신한촌에 자리한 한약방 덕창국(德昌局). 시베리아의 매서운 추위가 꺾이지 않은 야밤, 두툼한 옷차림에 수염이 희끗한 노년의 신사들이 모였다. 열흘 전인 17일 신한촌에서 펼쳐졌던 3·1운동의 열기가 채 가시기 전이었다.

이곳은 연해주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 의원 김치보(당시 60세·1859∼1941)의 가게였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 한인이 정착하던 초기부터 활동해온 원로 독립운동가였다. 이날 덕창국에 모인 이들은 독립만세운동에서 뒷방 신세로 머물러선 안 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청년 자제들이 모두 독립을 위해 피를 흘리고 있는데 늙은이라고 이 일을 할 수 없으랴.”(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독립운동 최전선에 나선 청년들을 지원할 목적으로 46세 이상의 남녀로 구성된 대한국민노인동맹단(노인동맹단)의 시작이었다. 당시는 평균 수명이 짧아 마흔 중반부터 ‘노인’으로 대접받던 시절이다. 3·1운동 이후 연해주 상황은 노인들이 나설 만큼 긴박했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등 연해주 한인들은 열성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만세운동에 가담하지 않은 이들은 돈을 기부했다. 일제가 “가난한 이들도 만세운동 모금에 기부하지 않는 자가 없어 거의 전 조선인들이 이에 호응하는 상황”이라고 본국에 보고할 정도였다.(‘지나잡건·支那雜件’, 조선군참모부 첩보 제19호, 1919년 3월 18일) 러시아 사람들도 “한인들은 손에 쇳조각 하나 들지 않은 채 결사적으로 독립을 요구하고 있는데, 우리는 오히려 총과 대포의 힘이 있는데도 국권을 다른 나라에 양보했다”(‘한국독립운동지혈사’)며 한국인들을 높이 평가했다.

이날 노인동맹단 단장으로 추대된 김치보는 총무(김순약), 의장(이일), 서기(서상구) 등 집행부와 의원 10여 명을 선임했다. 또 전단위원(傳團委員)을 뽑아 담당 지역을 맡기고, 각자 단원을 모집하게 했다. 입회금 7루블에 총단원 7000명을 목표로 삼았다. 노인동맹단은 모집을 시작한 지 열흘 정도 지난 4월 5일 3000원(당시 국내 쌀 한 가마 값은 3∼5원)에 달하는 거금을 모으는 저력을 과시했다.(조선헌병대 사령관, ‘독립운동에 관한 건·국외 제32호’) 또 그해 6월 말에는 회원 5000여 명도 확보한 것으로 추정된다.(김소진, ‘1910년대의 독립선언서 연구’) 이들은 이듬해인 1920년 3월 말까지 젊은이들 못잖게 왕성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 신한촌의 노인 독립운동가들


2014년 블라디보스토크 해양공원 인근에 세운 ‘한인 이주 150주년 기념비’. 당시 개척리로 불리던 이곳은 수많은 항일운동가의 활동 근거지였다. 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2014년 블라디보스토크 해양공원 인근에 세운 ‘한인 이주 150주년 기념비’. 당시 개척리로 불리던 이곳은 수많은 항일운동가의 활동 근거지였다. 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노인동맹단의 자취를 보기 위해 최근 블라디보스토크 라게르산 기슭에 자리 잡은 신한촌을 찾았다. 당시 신한촌의 집들은 대부분 러시아풍 목조 주택이었고 집마다 2, 3개의 한국식 온돌방이 갖춰져 있었다.(춘원 이광수의 기록) 신한촌의 중심지인 하바롭스카야 7번지 일대에 위치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덕창국 역시 비슷한 구조였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 이곳은 러시아인들이 거주하는 아파트촌으로 바뀌어 옛 모습을 확인할 길이 없다.

신한촌 중심가에 권업회, 한민학교 등과 지척에 있던 덕창국에는 한국독립운동사의 핵심 인물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당시 60세·1859∼1925)은 우수리스크(당시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머물다 이곳으로 옮겨와 노인동맹단을 지도했다. 산포수 의병장 출신으로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홍범도(당시 51세·1868∼1943), 안중근 의사의 숙부 안태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의 아버지 이승교(일명 ‘이발’) 등도 이곳을 드나들며 노인동맹단으로 활동했다.

때때로 노인동맹단은 청년들을 지원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행동에 적극 나섰다. 1919년 5월 5일 노인동맹단은 정치윤(당시 74세), 이승교(68세), 윤여옥(58세), 안태순(47세) 등 7명을 국내로 파견했다. 5월 들어 고국의 3·1만세운동이 침체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뒤 국내의 독립 열기를 고취하겠다는 목적이었다.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아들(이동휘)을 대신한 이승교는 당시 자신의 심정을 이같이 밝혔다. “나는 지금 칠십이 가까운 노인으로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 조선에 나가 다시 한 번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애국심을 고취할 수 있는 선포문을 대중 속에 알리겠다.”

7인은 일본 국왕과 조선총독에게 보내는 서한과 노인동맹단 취지서 수백 장을 품속에 지닌 채 서울로 잠입했다. 이들은 5월 31일 오전 11시경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군중 연설을 한 뒤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 일제 경찰에 체포된다. 이때 이승교는 “의(義)로써 치욕을 당하지 않겠다”며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했다.

노인동맹단의 활약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강우규(당시 64세·1855∼1920)를 다시 서울로 파견했다. 중국 길림성 요하현 노인동맹단 지부장이었던 강우규는 같은 해 7월 8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산으로 향하는 일본 배를 탔다. 하얀 팔자수염을 흩날리며 증기선에 오른 노인의 사타구니엔 폭탄이 숨겨져 있었다. 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를 처단하려는 계획이었다. 9월 2일 강우규는 남대문역(서울역)에서 해군 제복 차림의 사이토가 쌍두마차에 오르는 순간 폭탄을 던졌다. 그 자리에서 3명이 즉사하고, 34명이 부상을 입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10주년이 되던 해에 일어난 이 사건은 3·1운동 이후 국내에서 발생한 최초의 의열 투쟁이었다. 비록 총독 제거에 실패했지만 이날 거사는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고, 노인동맹단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된다.

○ 우수리스크의 비극


노인동맹단은 상해임시정부의 외곽단체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0년 3월 임시정부는 연통제(聯通制)에 의한 아령총판부(俄領總辦部)를 연해주에 설치하면서 노인동맹단장 김치보를 아령총판부의 부총판에 임명했다.

아령총판부는 연해주에서 군자금 조달과 정보 보고, 연락망 관리 등을 총괄하는 행정조직이었다.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장관)에 선임됐던 최재형(당시 59세·1860∼1920)이 최고 책임자(총판)를 맡았다. 최재형은 당시 연해주 최고의 부호였다. 하지만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한인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한인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앞장서고, 30여 개의 한인학교를 세워 동포들을 가르쳤다. 자신의 월급을 장래가 유망한 학생들의 유학 자금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평생 모은 재산을 송두리째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았다. 러시아제 신형 무기를 독립군들에게 조달하고 동의회, 권업회 등을 직접 조직하며 독립운동의 최전선을 지켰다. 그 결과 1907년 연해주로 건너온 안중근이 “(한인마을) 집집마다 최재형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말할 정도로 동포들의 존경을 받았다.

우수리스크 최재형 기념관에 조성된 최재형 동상. 비문에는 ‘애국의 혼, 민족의 별’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우수리스크 최재형 기념관에 조성된 최재형 동상. 비문에는 ‘애국의 혼, 민족의 별’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최재형의 마지막 발자취를 따라 우수리스크를 찾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00여 km 떨어진 우수리스크는 한민족과 많은 인연을 맺었던 곳이다. 과거 발해의 5경 15부 중 솔빈부(率賓府)가 자리했던 곳이기도 하다. 한인들은 이곳에서 농토를 개척해 부를 축적하고 한인마을을 형성했다.

우수리스크 시내 볼로다르스카야 38번지에는 최재형이 마지막까지 살았던 집이 100년 전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최재형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건물에 들어서니 파손된 유리창문이 눈에 띄었다. ‘최재형 가옥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그대로 두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일본군에게 체포돼 끌려 나가던 최재형의 긴박했던 마지막 상황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1920년 4월 연해주에 주둔 중이던 일본 군대는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의 한인들을 살육하는 ‘4월 참변’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눈엣가시 같던 최재형을 붙잡아 처형했다. 일본군이 내다 버리듯 처리한 그의 시신은 이후 발견되지 않았다.

1917년 숨진 헤이그 특사 이상설의 유허비도 최재형 고택 인근에 위치한 쑤이펀(綏芬·라즈돌나야) 강변에 세워져 있었다. 최재형과 함께 연해주 독립운동의 거두였던 이상설의 유골은 우수리스크에서 유일하게 동해로 흘러가는 하천인 쑤이펀에 뿌려졌다. 조국의 바다와 이어지는 쑤이펀 강변에서 의롭지만, 외롭게 숨져간 두 독립운동가의 넋을 기렸다.

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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