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공부를 하다가 알게 된 프랑스어 베레종(v´eraison)은 인상적이었다. 사전을 찾아보면 ‘과일의 성숙’이라고 나오는데 포도로 말하자면 청포도가 익어 붉은 포도가 돼가는 순간을 연상할 수 있다. 우리네 인생에 비유하자면 터닝포인트가 아닐까 한다.
서울 삼각지 ‘작은수산시장’의 채성태 대표는 젊은 날 유도라는 격한 운동을 하다가 요리로 인생의 베레종을 맞았다. 그가 택한 종목은 바다생선 요리. 포도가 성숙해도 포도나무의 기본 성질과 품종은 바뀔 수 없듯 그의 요리에는 늘 운동선수다운 승부가 따랐다.
그의 외식업계 데뷔 종목은 전복이었다. 전복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던 시절, 삼계탕용 닭에 생전복을 과감하게 듬뿍 넣어 푹 고아 끓여 내왔다. 그리고 통쾌하게 말했다. 닭살이나 전복살은 남겨도 좋으나 국물만은 다 먹어달라고. 문득 불도장이 떠올랐다. 닭, 오리는 기본이고 건해삼 건전복 상어지느러미 등 30여 가지 식재료가 들어가고 이에 맞게 굽거나 찌거나 하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 완성되는 중국의 보양식인 불도장은 결국 여러 귀한 재료는 주방솥 바닥에 있고 고객 앞에는 한 그릇의 국물만 내보이게 된다.
불도장처럼 채 대표는 전복과 닭을 우려낸 국물을 보약처럼 먹게 했던 해천탕을 탄생시켜 주목을 받았다. 이후 그는 바다생선으로 만들 수 있는 ‘한 그릇 음식’에 줄곧 몰두했다. 초덮밥은 초밥 위에 두툼한 생선이 올라간 일본풍 덮밥이다. 초덮밥의 생선회가 꽤 넉넉해 초덮밥 한 그릇을 놓고 술잔을 기울이는 이들도 적잖게 있을 정도다.
최근에는 붕장어(아나고) 사랑에 푹 빠졌다. 해안가를 따라 도는 여행을 즐기다가 해변의 향토음식을 보고 떠오른 아이디어에서 시작했다. 민물장어가 매끈하게 빠진 ‘차도남’이라면 붕장어는 마치 ‘차도녀’에게 늘 차이기만 하는 덩치 큰 순정남 같은 느낌이다.
유도 선수 출신인 채 대표는 아무래도 바닷장어인 붕장어가 그와 어울리는 ‘의리의 장어’라고 본 듯하다. 붕장어를 푹 고아내면 튼실하지만 다소 징그럽던 생김새는 이내 부드러운 생선살로 무너져 내린다. 여기에 된장과 연한 배추를 넣어 한 번 더 푹 끓여준다. 그 뒤 마른 국수를 넣는다. 건면에서 나오는 전분도 어느새 붕장어탕으로 스며들어 부드럽고 걸쭉한 질감을 더하고 국수는 붕장어탕과 일체가 돼 한 그릇이 된다. 붕장어국수와 함께 즐길 수 있는 붕장어튀김은 세상 부드러운 바삭 친구다.
만드는 노력과 붕장어국수의 푸짐함에 비해 요즘 식대치곤 비싸지 않아 이유를 물으니 인근 군인들이 생각났단다. 국방부 인근이라 젊은 군인들이 점심시간에 많이 오가는데 쉽게 사먹을 수 있는 문턱 낮은 든든한 한 끼가 되어주고 싶었던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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