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마음, 첫 발자국]여우를 만나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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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순 2020년 신춘문예 동화 부문 당선자
심순 2020년 신춘문예 동화 부문 당선자
아일랜드 더블린에서의 일이다. 집과 집을 경계 짓는 낮은 관목 사이에서 여우 한 마리를 보았다. 그 여우가 배가 고파 밤마다 뜰을 파헤치며 구근을 찾아 헤맨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정육점으로 달려가 주인이 버리는 것들을 얻어왔다. 여우가 고개를 내민 곳 바로 앞에 그릇을 두었다. 분명 근처에서 냄새를 맡았을 텐데도 여우는 섣불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고양이와 갈매기, 까마귀가 주위를 맴돌았다. 이윽고 까마귀가 고기를 잽싸게 채갔다. 잠시 후 한 점 더. 다시 한 점 더. 마침내 여우가 나타나더니 남은 고기를 물고 갔다. 여우는 까마귀가 먹고도 탈이 없는지 살폈던 모양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여우의 주방장이 되었다. 소뼈, 닭고기, 돼지비계…. 구할 수 있는 모든 걸 구했다. 여우는 영리했다. 돼지 껍질을 둔 날이었다. 양이 많았다. 여우가 여러 조각인 껍질을 그릇에서 집어 땅에 쌓기 시작했다. 햄버거 빵 위에 패티를 얹고 양파를 얹고 토마토를 올리듯, 차곡차곡. 그러더니 한입에 모두 물고 갔다.

계절이 두어 번 바뀌었다. 어느 날 미처 여우에게 줄 걸 마련하지 못한 내가 급한 대로 달걀을 꺼내 주었다. 여우가 가뿐하게 달걀을 물고 갔다. 다음 날엔 여우가 가장 좋아하는 소뼈를 준비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여우가 뼈를 보고 나를 보더니 관목으로 그냥 돌아갔다. 순간 나는 여우가 하는 말을 들었다. “어제 줬던 그 달걀이 필요해.” 나는 냉장고에서 달걀을 꺼내 소뼈 옆에 두었다. 금방 여우가 나타나더니 달걀을 물고 갔다. 다시 나타났다. “달걀 좀 더 줘.” 메시지가 명확했다.

여우가 왜 달걀을 원했는지 곧 알게 됐다. 얼마 후 담장 옆 헛간 아래에서 새끼 여우 네 마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밤에 여우가족은 낮 동안 웅크리고 다녔을 관목에서 빠져나와 뜰에서 신나게 뛰놀곤 했다.

어느 여름날 아침이었다. 한 무리의 여우들이 나타났다. 어미보다 커 버린 새끼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다른 두 여우를 포함해 모두 일곱 마리였다. 그렇게 여러 마리가 한꺼번에 나타난 적은 이전에 없었다. 어슬렁거리거나 뜀을 뛰거나 장난을 치는 여우들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런데 어미 여우만은 나를 똑바로 보며 얌전히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지?

다음 날이 돼서야 이유를 알았다. 종일 기다렸지만 여우가 오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나와 2년간 눈을 맞췄던 여우는 다시 오지 않았다. 여우가족이 더 넓은 보금자리를 찾아 떠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니까 어미 여우는 마지막으로 내게 인사를 하러 왔던 것이다.

호주 산불이 반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다. 캥거루, 코알라, 낙타, 웜뱃 등의 사진을 보고 여우를 떠올리며 기도했다. 부디 새 터전에서 안전하게 살고 있기를, 빼앗긴 땅에 대해 많이 분노하지 않기를, 인간들의 이기심에 쉽게 실망하지 않기를….
 
심순 2020년 신춘문예 동화 부문 당선자
#호주 산불#새 터전#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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