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을 목전에 둔 1월 30일(현지 시간) 영국 런던에서 열린 런던비평가협회 시상식. 미국에서 바쁜 일정을 소화하던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의 감독상과 작품상 수상 소감을 동영상으로 대신했다. 동영상 수상 소감임에도 불구하고 봉 감독의 말솜씨에 시상식장은 폭소와 박수로 가득 찼다.
“머릿속에서 영원히 빠져나가지 않는 기생충처럼 ‘패러사이트(기생충)’가 여러분의 기억 속에 오래오래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영상만으로도 좌중을 휘어잡는 봉 감독 화법의 특징은 유머와 촌철살인, 그리고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함이다. ‘오스카 레이스’ 동안 500여 차례 인터뷰, 100여 차례 관객와의 대화(GV)에서 그가 말한 발언들이 오스카 시상식이 끝난 뒤에도 유튜브 등 인터넷에 오랫동안 회자되는 이유다. 봉 감독의 숱한 어록을 통해 ‘기생충’의 여정을 되짚었다.
▽유머 봉
―(‘‘설국열차’는 ‘윈터 솔져’ 2편 아니었나. 거기엔 캡틴 아메리카인 크리스 에번스가 출연했으니까’라고 묻자) “에번스는 (영화에서) 생선을 밟고 미끄러집니다. 그런 건 마블의 감성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지난해 11월 버라이어티 인터뷰)
―“LAFCA(LA비평가협회)를 들으니 갑자기 AFKN이 생각납니다. 주한미군방송인데, 한국 문화가 정말 보수적일 때 AFKN은 유일하게 야한 거, 폭력적인 걸 볼 수 있던 곳이었어요. 아홉 살 때 부모님이 주무시면 혼자 나와서 금요일 밤에 영화를 봤습니다. 그땐 몰랐지만 정말 유명한 감독님들의 영화였어요. 그 당시엔 영어도 몰라서 영상만 봤는데 그때 몸속에 영화적인 세포들을 만든 것 같습니다.”(지난해 12월 LA비평가협회 시상식 수상 소감)
―(‘한국 선거에 나가도 될 것 같다’는 질문에) “저와 여기 모든 배우분들은 오로지 예술에만 미친 사람들로서 정치와는 아주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지난해 10월 뉴욕 영화제 인터뷰)
―(‘많은 사람들이 셀카를 찍자고 했었다. 기억나는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에) “재밌는 분위기의 어떤 여자분이 와서 셀피를 찍으려고 했는데 화면 플립이 계속 안 돼서 1분 동안 헤매다가 그냥 갔습니다. 그때가 제일 안타까웠어요.”(2월 오스카 레드카펫 인터뷰)
―“제가 습관이 좀 이상하게 들어가지고 집이나 사무실에서 시나리오를 못 쓰고 항상 카페나 커피숍에서 쓰거든요. 막상 이제 그 시나리오를 썼던 커피숍이 영화 개봉할 때쯤 가보면 망해서 없어진 적이 많아요. 제가 좋은 시나리오를 쓸 수 있게 해준 커피숍 주인분들께 이 상을 바칩니다.”(1월 할리우드비평가협회 수상 소감)
―“(영화가) 왜 잘된 것 같냐고 물으셨는데… 저도 잘 모르겠지만 그날 비 오는 밤에 가정부(이정은)가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인 것 같아요.”(1월 샌타바버라 영화제 관객과의 대화)
―“오늘은 비건 버거를 맛있게 먹으면서 시상식을 즐기고만 있었거든요. 살면서 예상치 못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 것 같아요. 이제 내려가서 반쯤 남아 있는 비건 버거를 먹어야겠습니다.”(1월 크리틱스 초이스 수상 소감)
▽촌철살인 봉
―“한국은 겉으로는 K팝, 초고속인터넷, 정보기술(IT) 등으로 매우 부유하고 매력적인 나라처럼 보이지만 부유층과 빈곤층의 빈부 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절망에 빠져 있고요.”(1월 영국 가디언 인터뷰)
―“세상이 오히려 혁명으로부터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습니다. 혁명이란 것은 부서뜨려야 할 대상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게 뭔지 파악하기가 힘들고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기생충’은 그 복잡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1월 샌타바버라 국제영화제 인터뷰)
―“이 가족들이 멍청하거나 무능력하거나 게으른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다 멀쩡히 일을 하잖아요, 막상 부잣집에 들어가면. 멀쩡하고 분명 능력 있는 사람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자리가 없다는 것, 그게 이 영화의 출발점이에요. 그거 자체가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양극화 시대에 대해서.”(지난해 10월 뉴욕 영화제 인터뷰)
―“관객들이 이야기에 완전히 빨려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들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거죠. 영화가 끝나고 집에 가서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을 때 비로소 영화가 전달하고자 했던 지적이고 논쟁적인 메시지가 와 닿으면서 한 방 먹은 느낌이 드는 것, 영화의 메시지에 완전히 매료돼 계속 그 생각만 하게 되는 것. 그런 경험을 관객에게 선사하고 싶습니다.”(1월 뉴욕타임스 인터뷰)
―(‘기생충’은 왜 한국어로 만들었냐는 황당한 질문에) “‘설국열차’에도 부자와 가난한 사람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번에는 좀 더 내 이웃, 내 주변에서 정말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고 싶어 자연스럽게 한국이라는 지역, 한국어를 선택했다.”(2월 오스카 레드카펫 인터뷰)
▽겸손 봉
―“나흘간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님을 세 번 보고 있고 벤, 조슈아 사프디 형제, 타란티노 감독님을 세 번 만나 인생에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없을 것 같습니다.”(지난해 12월 전미비평가위원회 외국어영화상 수상 소감)
―“제가 비록 지금 골든글로브에 와 있긴 하지만 BTS(방탄소년단)가 누리는 파워와 힘은 저의 3000배는 넘는 거니까요. 그런 아티스트들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나라인 것 같아요. 감정적으로 격렬하고 다이내믹한 나라거든요.”(1월 골든글로브 레드카펫 인터뷰)
―“최근 자주 뵙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님을 보니까 25년 후에 제가 그분의 나이가 되거든요. 오늘 이후 25년간 진정한, 아웃스탠딩한 감독이 될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1월 샌타바버라 영화제 수상 소감)
―“제가 쓴 대사와 장면들을 훌륭하게 펼쳐준 배우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살아있는 배우들의 표정과 보디랭귀지야말로 가장 유니버설한 만국 공통어란 생각이 들어요. … 혼자 외롭게 카페에서 보낸 시간이 많았어요. 시나리오를 커피숍에서 쓰는데 이렇게 런던 한복판 로열 앨버트홀에 서게 될 날이 올 줄 정말 상상도 못 했던 거죠.”(2월 영국 아카데미·BAFTA 시상식 수상 소감)
▽긍정주의자 봉
―“저 자신이 BAFTA나 오스카의 다양성에 공헌하고 있는 건지…. 저는 20년간 만들어 오던 영화가 영광스럽게 초대돼서 와 있는 거니까요. 여성이나 인종, 성적 정체성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의도적으로 그걸 의식하지 않더라도 균형들이 자연스럽게 맞춰지는 날들이 올 거라고 봅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면에서 하고 있는 노력에 의해서요. 저는 긍정적입니다( I’m optimistic).”(2월 영국 아카데미 수상 후 기자회견)
―(현재의 디스토피아적 특성에 대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그 어떤 모습도 디스토피아라고 정의 내리고 싶지 않습니다. (영화의 결말에서 최우식이 소주 한잔을 부르는 장면을 언급하며) 가사가 엄청나게 긍정적이진 않지만, 분명히 그 안에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담겨 있습니다.”(지난해 10월 타임지 인터뷰)
배우들 말말말
봉준호 감독과 오스카 일정을 함께한 배우들도 봉 감독 못지않은 입담을 과시했다. 미국 텔루라이드 영화제부터 약 5개월간 배우 송강호 이선균 박소담 최우식의 유쾌한 인터뷰, 수상 소감을 모았다.
○ 송강호
“(봉 감독을) 처음 만났을 때는 배우 티모테 샬라메처럼 날씬했는데 지금은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과 더 닮았다.”
“한국에서 나를 잘생겼다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나를 보고 한국 배우들이 나처럼 생겼을 거라 생각하면 큰 실수다. 예를 들면 주드 로가 50명, 브래드 피트가 50명 항상 대기하고 있다.”―이상 지난해 12월 LA비평가협회 시상식 수상 소감
“(봉 감독의) 다섯 번째(영화 출연)는 제가 확신을 못 하겠다. 너무 힘들다. 계단도 많이 나오고 반지하에 살고 비도 맞아야 된다. 다음에는 (기생충 속) 박 사장 역이면 생각해 보겠다.”―아카데미 시상식 직후 기자간담회
○ 이선균
“본의 아니게 할리우드에 기생하게 된 것 같아 민망하다. 사업과 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상생하고 공생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올 1월 미국 배우조합상(SAG) 시상식 수상 소감
“너무 기쁘고요. 저희가 엄청난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오스카가 선을 넘은 것 같네요.”―아카데미 시상식 수상 소감
○ 박소담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오늘 밤에도 열심히 많은 기사와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게시물 찾아보면서 온몸으로 느껴봐야 할 것 같다. 아마 잠 못 이루지 않을까….”―아카데미 시상식 수상 소감
○ 최우식
“‘계획에 없던 건데’라는 대사가 있는데 계획하지 못한 큰 이벤트가 있어서 행복하다. 봉준호 감독과 아버지(송강호)가 미국 프로모션을 하며 고생이 많으셨는데 앞으로 평생 원동력으로 삼겠다.”―아카데미 시상식 수상 소감
“아시아에는 전설적인 영화들이 많다. 다음 해, 그 다음 해에 더 많은 영화들이 왔으면 좋겠다.”―올해 1월 SAG 시상식 수상 소감
김기윤 기자 pep@donga.com·이서현 baltika7@donga.com·김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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