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93화> 유럽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세계의 이목은 프랑스 파리에 집중됐다.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의 전후 처리를 논의하는 강화회의가 열렸기 때문이다. 열강의 식민지로 있던 약소국가들은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공개한 전쟁 종결을 위한 14개항의 평화 원칙 가운데 ‘민족자결주의’에 열광했다.
우리 독립운동가들 역시 큰 기대를 걸었다. 윌슨 대통령의 비공식 대표 찰스 크레인은 1918년 11월 중국 상하이(上海)를 방문해 “파리강화회의는 피압박 민족들이 해방을 도모하는 데 최적의 기회”라고 소개했다. 크레인은 독립운동단체 신한청년단의 지도자 여운형과 따로 만난 자리에서는 “대표를 파견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고무된 독립운동단체들은 대표 파견을 추진한다. 미주지역 대한인국민회는 이승만과 정한경, 상하이 신한청년단은 김규식,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는 윤해와 고창일을 각각 대표로 정했다.
하지만 이후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미주 한인 대표는 일본과의 관계를 의식한 미 정부가 여권을 내주지 않아 출국하지 못했다. 러시아 한인 대표는 1919년 2월 출발했으나 혁명으로 혼란했던 소련을 피해 몽골, 노르웨이, 영국 등을 거쳐 가는 바람에 그해 9월 26일에야 파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강화조약이 체결된 지 석 달이 지난 뒤였다.
다만 김규식은 달랐다. 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중국인으로 가장하고 중국 여권을 사용했다. 또 일본을 경유하지 않는 인도양 노선의 선박을 이용했다. 김규식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일제는 파리 주재 자국 대사관을 통해 프랑스 외교부에 일본 여권을 소지하지 않은 한국인의 프랑스 입국을 거절하도록 요청했다.(‘한민족독립운동사’) 이런 방해 공작에도 김규식은 1919년 2월 1일 상하이를 출발해 40여 일 뒤인 3월 13일 파리에 도착했다. 그리고 한국민의 뜨거운 독립 열망을 세계에 알리는 데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 일제의 방해를 뚫고 파리에 도착하다
파리 9구 샤토됭 거리 38번지. 오페라 가르니에 극장 등 파리 관광 명소에서 가까운 이곳에는 7층 석조건물이 서 있다. 김규식은 이 건물에 파리강화회의 한국민대표관과 한국통신국을 설치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이 건물 입구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청사 1919-1920’이라는 안내판이 부착돼 있다.
1919년 4월 11일 수립된 상하이임시정부는 이틀 뒤인 4월 13일 김규식을 외무총장 겸 전권대사로 임명하고 신임장을 파리로 보내주었다. 공식적으로 임정 대표 자격을 얻은 김규식은 본격적인 외교활동에 뛰어든다. 그는 우선 스위스에 유학 중이던 이관용과 미군으로 유럽전선에 참전했다가 독일에 있던 제대 군인 황기환을 불러들여 각각 부위원장과 서기장직을 맡겼다. 상하이에 있던 김탕 조소앙 여운홍 등도 그해 5∼7월 대표단에 합류했다. 이처럼 임정의 초기 외교는 파리강화회의를 준비하는 활동에 집중됐다.(‘독립운동사’)
한국통신국은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4월 26일부터 5월 말까지 편지 형식의 ‘회람’을 8차례에 걸쳐 발간했다. 회람은 강화회의 각국 대표단과 공관, 언론사, 정치인, 학자들에게 전달됐다. 5월 10일에는 △한국의 역사·문화·국제적 지위 △3·1운동과 임정 성립 △일본 제국주의 폭압적 통치 상황 등을 소개하고 한일합방 폐지와 대한민국 국가 주권 승인을 요구하는 독립공고서를 강화회의에 제출했다. 5월 24일에는 강화회의 의장 조르주 클레망소에게 임정 대통령 이승만 명의의 서한을 보내 임정과 김규식의 외교활동 승인을 요청했다. 일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일본 외무성과 강화회의 일본 대표들은 하루 3차례씩 프랑스 신문사에 전화해 “한국 대표가 부탁하는 것은 무엇이든 게재하지 말라”며 방해공작을 펼쳤다.(‘김규식의 생애와 민족운동’)
○ 냉대에도 서구 열강의 인식을 바꾸다
파리위원부는 강화회의 측의 반응이 없자 그해 6월 11일 다시 강회회의 의장에게 서한을 보내 한민족의 독립 요구에 대한 입장을 요구했다. 강화회의에 참석한 영국 총리와 미국 대통령에게도 같은 편지를 보냈다. 마침내 기다리던 답신이 도착했지만 내용은 기대와 달랐다. 강화회의는 사무총장 명의로 보낸 서신에서 “한국 문제는 1차 대전 이전의 문제이기 때문에 강화회의에서 취급할 성질의 것이 아니며 곧 창설될 국제연맹에서 제기돼야 할 것”이라며 한발 뺐다. 사실상 한국의 요구를 거절한 셈이었다. 결국 한국 문제에 대해서는 어떠한 논의 없이 6월 28일 대독(對獨) 강화조약만 체결한 채 파리강화회의는 끝이 났다.
그럼에도 관심 밖에 있던 한국 독립 문제가 국제적으로 다뤄져야 할 사안이라고 인식시키는 데에는 일정 부분 성공했다. 프랑스 일부 언론은 파리강화회의가 한국 문제를 외면한 사실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며 한국 편을 들었다. 프랑스 일간지 앙탕트는 같은 해 7월 7일자 기사에서 “강화회의가 한국민의 절규를 외면했다”고 지적한 뒤 “한국민이 영원히 노예상태로 머물러 있게 된 것을 보고만 있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후 일방적으로 일본 편만 들던 서구 열강들이 한민족의 독립 요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2차 대전 때 영국 등이 한국 독립을 지원하고 나선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임시정부의 파리강화회의 및 유럽 외교활동’)
○ 계속된 노력에 영국 프랑스에 친한파 조직 결성
파리위원부는 강화회의 결과에 실망했지만 굴하지 않았다. 선전 외교를 이어갔고 마침내 결실을 본다. 파리위원부는 1919년 7월 28일 프랑스 동양정치연구회에서 연설회를, 이틀 뒤인 7월 30일에는 프랑스 국민정치연구회에서 한국문제보고회를 개최했다. 또다시 이틀 뒤인 8월 1일부터 9일까지 스위스 루체른에서 열린 국제사회당대회에 조소앙을 파견하기도 했다. 그 결과 참가국 25개 나라의 만장일치로 한국 독립 관련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국제회의에서 한국 독립 요구를 인정받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또 국제사회당본부는 이듬해 4월 대한민국의 성립과 대한민국이 독립국임을 승인하도록 국제연맹과 열강들에 요구했다. 독립신문은 이 사실을 4월 6일자 호외로 보도했다.
파리위원부는 정부 관계자에 국한된 선전 외교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일반인과 서구 언론에 대한 설득 작업도 병행했다. 1919년 9월 프랑스어로 된 책자 ‘한국의 독립과 평화’ 5500부를 발행했다. 이어 1920년 5월부터 1921년 5월까지 월간지 ‘자유대한’을 매달 1000부씩 프랑스어와 영어로 제작해 언론사와 각국 유명인사들에게 보냈다.
이런 일련의 노력들이 계속되자 한국 문제에 무관심했던 유럽 언론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1919년 3월부터 1920년 10월까지 133개 프랑스 신문이 423회에 걸쳐 한국 관련 기사를 게재했고 나머지 유럽 지역에서도 48개 신문이 94회의 한국 관련 기사를 실었다. 한국독립 문제가 국제 문제로 부각되자 영국 하원과 프랑스 상원에서 한국 관련 내용이 토의 대상에 오르기 시작했다. 특히 영국 하원의원들은 1920년 4월 대정부 질의를 통해 일본의 한국인 탄압, 수원 제암리 사건(일제 군경의 민간인 학살 사건), 한국의 국제연맹 가입 문제 등을 따지며 일본을 규탄했다. 교황은 한국인의 자유와 행복을 기도한다는 글을 파리위원부에 보내기도 했다.(‘독립운동사’)
영국과 프랑스에선 친한파 인사들이 잇따라 한국친우회를 결성했다. 1920년 10월 26일 친한파 영국인 의원과 교수 60여 명이 런던의 하원의사당 6호실에 모여 한국친우회를 만들었다. 프랑스에서도 1921년 6월 23일 파리의 사회박물관에서 23명이 한국친우회를 설립했다. 당시 일본의 동맹국이었던 영국에서 한국에 동정적인 여론이 일어난 것은 일제에 큰 타격이 됐다.
파리위원부의 선전 외교는 1919년 8월 김규식이 구미위원부 활동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고 파리위원부 업무를 넘겨받은 황기환마저 1921년 7월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일시 중단된다. 하지만 임정의 대(對)유럽 외교는 1929년부터 파리에 고려통신사를 설립해 독립운동을 벌여왔던 서영해가 1934년 주불 외무행서 외교위원으로 임명되면서 재가동된다. 이후 광복을 다섯 달 앞둔 1945년 3월 프랑스 정부는 임정에 정식 외교관계 수립을 요청했고 임정은 서영해를 주불 대표(대사)로 정식 선임했다. 서영해는 광복 이후에도 대사로 활동하다 1947년 귀국길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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