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마음, 첫 발자국]엘로이즈 이야기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27일 03시 00분


서장원 2020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자
서장원 2020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자
신춘문예 당선 통보를 받고 나서 가장 먼저 하려고 했던 일이 있다. 극장에 가서 혼자 영화를 보는 것이다. 아주 망한 영화가 아니고서야 영화는 기록에 남으니까, 그리고 어떤 작품은 영화 채널에서 여러 번 틀어주기도 하니까, 그렇게 그날을 오래 기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당선 통보를 받은 날에는 정작 그러지 못했다. 퇴근하고 홍대로 나왔을 때에는 오후 7시가 넘어 있었고 친구와 저녁을 먹으니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 됐다. 그 뒤로도 이런저런 이유가 생겨 한동안 극장에 못 갔다.

올해 처음으로 극장에 간 것은 이달 첫 번째 주말이었다. 그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봤다. 올해 만나는 영화 중에 이보다 더 좋은 영화를 보지 못하겠다 싶을 정도로 영화가 마음에 들었다. 그 다음 주에 영화관에 가서 한 번 더 영화를 봤다. 그리고 왜 이렇게 이 영화가 좋은지 스스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영화 속 엘로이즈 같은 캐릭터에 언제나 마음을 빼앗긴다.

엘로이즈는 그다지 강한 캐릭터가 아니다. 영화에는 각기 다른 삶을 선택한 여자들이 등장한다.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영화의 초반부, 투신하여 속박된 삶을 벗어났다고 설명하는 엘로이즈의 언니, 결혼 밖에서 나름대로 삶을 구축한 마리안느처럼 강인한 여성들이 있다. 반대로 시대가 부여한 여성의 삶을 받아들인 엘로이즈의 모친도 있다.

엘로이즈는 이들 중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다. 엘로이즈는 바다에 뛰어들어 죽을 만한 결기가 없으며, 과감히 마리안느와 새 삶을 찾지도 못한다(여자 둘이 함께 사는 것이 바다에 뛰어드는 것만큼 위험한 시대가 아니었을까 싶다). 결혼해 어머니처럼 그 나름의 행복을 누렸겠다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엘로이즈가 좋았다. 패배하고 불행해지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들은 보통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이 영화만큼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을 좋아하는데, 그중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들은 ‘나를 보내지 마’의 캐시와 토미다. 이들은 장기 기증을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다.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캐시와 토미는 장기 기증을 거부하기 위해 어릴 적 자신들을 수용한 기숙학교의 후원자를 찾아간다. 그것이 이들이 생각한 가장 최대치의 저항인 것이다. 이들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는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무용한 저항을 하다가 완패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는 이들의 움직임을 유의미하게 평가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예술 작품 속에서는 이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출 수 있다. 그것이 예술이나 문학의 역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오직 텍스트 안에서 이들의 무의미할 만큼 작은 움직임을 보는 것은 나의 무용한 즐거움이다. 앞으로도 쓸데없는 글을 많이 쓰고 싶다.
 
서장원 2020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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