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인편에 적으신 편지 보고 든든하오며, 그 사이에 인편이 간혹 있사오되 글씨 쓰는 일이 매우 힘들어 못했으니 죄가 많사옵니다. 오죽이나 꾸짖어 계시오리이까? …호방이 내려가기에 바빠서 이내 그치오며, 내내 평안하시길 바라옵니다.”
서울에 있는 32세의 추사 김정희(1786∼1856)가 1818년 4월 대구에 있는 가족에게 쓴 한글 편지다. 답장을 못 보냈다고 ‘죄가 많다’며 자책하는 걸 보면 수신자는 아버지나 어머니였을까. 웬걸, 받는 사람은 아내 예안 이 씨다. 김정희는 아내에게 항상 극존칭으로 편지를 썼다.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1766∼1837)도 마찬가지였다.
추사 집안의 한글 편지 85통을 현대어로 옮기고 해설한 책이다. 이 편지들은 조선에서 남존여비 사상이 극심했고, 집안일은 여성들의 전유물이었다는 통념을 깬다. 추사 집안의 남성들은 안살림과 노비 관리, 제사나 혼인 등 많은 일을 해냈음이 여러 편지에서 드러난다. 남자들은 의복과 음식을 잘 알았고, 옷감이나 반찬거리를 뒷바라지했으며, 직접 살림을 하기도 했다.
김노경은 이런 꼼꼼한 편지도 썼다. “일전에 창녕(둘째 아들 김명희)의 생일에 만두를 하여 먹으니, 메밀은 먹물을 들여 놓은 것 같고 침채(김치)가 없어 변변히 되지 않았으니, 앞으로 인편에 메밀가루를 조금 얻어 보내고 메밀국수 만드는 법을 기별하면 다시 만들어보겠지만 잘될지 모르겠다. 갓과 우거지를 작년에도 많이 보내어 겨울을 났거니와 올해도 조금 넉넉히 얻어 보내어라.”
남자는 부엌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금기는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인다. 출가한 딸이 자주 친정에 가는 등 가깝게 지냈던 것도 확인할 수 있다.
고려대 문화창의학부 초빙교수로 역사 속 소외 계층에 대한 책을 주로 써 온 저자는 “조선 후기 남성은 여성과 협력해 각종 집안일을 일상적으로 했다”면서 “권력의 향유자라기보다 집안의 대표자 역할을 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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