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당시 보성사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는 2만1000장. 전국에서 벌어진 거족적 항일운동의 수요를 어떻게 감당했을까. ‘3·1 독립선언서 등사본’을 최근 연구 중인 김도형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은 “각 지역에서는 여러 조직을 통해 전달받은 독립선언서를 보고 이를 다시 등사해 배포하면서 만세 시위에 돌입했다”며 “3·1운동 확산에 크게 기여한 건 등사본 선언서”라고 밝혔다.
“유(惟) 아(我) 민족은 세계의 대세에 조(照)하며 정의와 인도에 기하여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하여 최대의 결심과 최후의 성의(誠意)로써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노라.”
함경북도 성진군 만세시위에서 사용된 선언서의 첫머리다. 3·1독립선언서가 여러 단락에 걸쳐 서술한 내용이 압축돼 있다. 김 연구위원에 따르면 등사판 선언서는 경남 하동에서 사용한 것을 비롯해 이처럼 종이 한 장에 들어갈 수 있게 만든 요약본이 많았다. 만세시위 현장에서 읽고 바로 시위에 들어갈 수 있게 가능한 한 간략하게 만들었던 것. 최남선이 기초한 3·1독립선언서가 한문이 많이 섞여 시위 현장에서 대중이 이해하기 어렵기도 했다. 김 연구위원은 “‘세계개조’ ‘민족자결’ ‘정의·인도’ 같은 핵심 대목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등사판에 맞췄기에 선언서 종이의 크기가 작았던 것도 요약을 한 또 다른 이유다. 독립기념관이 소장한 한 등사판 선언서(정석해 제작)는 가로 32cm, 세로 24cm 정도다.
등사본 제작자는 등사판을 만든 경험이 있는 면서기, 학교 교원과 학생, 천도교·기독교 관계자 등이었다. 일제는 선언서를 등사해 배포하는 경우에도 민족대표와 마찬가지로 출판법 위반죄를 적용해 처벌했다. 소지만으로도 일제에 의해 처벌받을 수 있었기에 남아 있는 등사판 선언서는 수량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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