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7월은 식민지조선 사람들에게 ‘잔인한 달’이었습니다. 8월 초까지 무려 세 차례나 하늘이 뚫린 듯 비가 쏟아졌기 때문입니다. 동아일보 8월 3일자 3면 큰 제목이 ‘1개월 간에 3차 대홍수’였고 작은 제목은 ‘경성시내의 침수가옥이 2000여 호에 달하고 전차가 끊기고 도로 교량이 모두 떠나가’였습니다. 특히 8월 2일 경성에는 하루 354.7㎜의 엄청난 폭우가 내렸습니다. 1907년 기상 관측 이후 오늘날까지 깨지지 않는 기록입니다.
1차로 쏟아진 비는 7월 초부터 시작해 7월 10일자에 ‘50년래의 대수해’라는 기사 제목이 등장하게 만들었습니다. 한강은 무섭게 불어나 9일 오전 7시경 수위가 이미 10m를 넘었고 흙탕물이 용산과 뚝섬, 마포, 영등포 등을 집어삼켰습니다. 한강 주변에서는 1917년 개통된 인도교(지금의 한강대교)만 눈에 띌 뿐 나머지는 모두 물에 잠겼다고 동아일보는 전합니다.
간신히 목숨만 건진 수많은 수재민들은 먹을 것과 잠잘 곳을 구하지 못해 말 못할 고통을 겪었습니다. 굶주린 수재민들에게는 밥 한 그릇이 절실했죠. 쌀과 땔나무가 있어도 모두 빗물에 젖어 밥을 지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동아일보는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수재민들을 지켜볼 수만은 없어서 구호사업에 발 벗고 나섰습니다.
동아일보는 ‘뚝섬구호반’을 편성해 10일 새벽 왕십리에서 다섯 수레의 따뜻한 밥과 한 수레의 반찬을 만들어 진퍼리(지금의 행당동)에서 거룻배를 타고 뚝섬을 향해 갔습니다. 그때 뚝섬의 지번은 ‘경기도 고양군 독도면 서독도리와 동독도리’였죠. 서독도리는 지금의 성수동 일대를 말하고 동독도리는 자양동과 구의동을 아우르는 지역입니다. 구호반은 홍수 피해가 극심했던 동독도리 즉 뚝섬 동쪽지역을 맡았습니다.
동아일보 구호반이 왔다는 소식에 남녀노소 수재민들은 바가지나 함지박을 들고 몰려나왔습니다. 기사에는 ‘말 못하게 야윈 두 뺨에 그윽한 미소를 띈 채 서둘러 돌아가는 수재민의 모습을 보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느꼈다’는 소감이 나옵니다. 아랫도리를 벗은 5세 아이가 어른들에게 밀려나 밥을 손에 쥔 채로 우는 모습에 다들 눈물 흘렸다는 가슴 아픈 모습도 소개했죠. 이 상황을 종합한 7월 11일자 3면 큰 제목이 ‘따뜻한 밥 보고 쏟아지는 감격의 눈물’이었습니다. 동아일보 창간기자 유광렬은 ‘기자 반세기’에서 이 일을 두고 “아마 우리나라 신문 사상 신문사가 수해구제에 출동한 일로는 처음”이라고 돌아봤습니다.
동아일보는 먹을 것만 주는데 그치지 않고 의약품도 전달했습니다. 직접 뚝섬을 방문해 진료에 나선 남녀 의사의 활약상은 기사로 전달했고요. 또 각계에서 자발적으로 보내온 기부금품 내역을 같은 날짜 지면에 실었습니다. 이는 이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불우이웃 또는 이재민 돕기 성금’의 첫 출발이었던 셈입니다. 기부금 내역은 7월 25일자까지 계속 게재했고 ‘정성을 다해 가장 효과가 크도록 구호를 하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습니다.
동아일보가 이렇게 나선 배경에는 나라 잃어 더 서러운 수재민을 돕는데 조그만 힘이나마 보태기 위한 동포애가 있었습니다. 7월 11일자 3면 수해 기사에는 ‘동포’라는 단어가 모두 6번이나 나옵니다. 총독부가 손을 놓고 있거나 우물쭈물 할 때 우리 동포를 위해서 소매를 걷어붙였던 것이죠. 결과적으로 신문사가 중앙정부 또는 지방정부의 역할까지 맡아 했던 셈입니다. ‘정부 없는 신문’ 시절의 일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수난을 겪은 동포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도 있었습니다. 살 길을 찾아 고향을 버리고 만주로, 일본으로 이주한 동포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이 억울한 피해를 당했으나 보호해줄 정부가 없어 하소연할 곳조차 찾지 못했을 때 동아일보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이 내용은 다음 기회에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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