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漫畵). 사전에선 ‘이야기 따위를 간결하고 익살스럽게 그린 그림’, ‘사물·현상의 특징을 과장해 인생이나 사회를 풍자, 비판하는 그림’이라고 풀이합니다. 많은 나라들처럼 한국에서도 초창기 만화는 신문이 주도했습니다. 신문 만화는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데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는 은유적 표현으로 당국의 검열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현대 한국만화의 비조(鼻祖)로는 한말 대한협회가 발간한 대한민보에 한 칸 만평 ‘삽화’를 연재한 화가 이도영을 꼽습니다. 1909년 6월 2일자 창간호에 ‘대·한·민·보’ 4행시를 읊는 개화기 신사를 시작으로 주로 시대상황을 풍자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1910년 국권 상실과 함께 신문 암흑기를 맞으며 신문 만화도 자취를 감췄지만 1920년 4월 1일 창간한 동아일보가 살려냅니다. 창간호부터 단군이 남기신 터(檀君遺趾·단군유지)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한 칸 만화로 천명한 동아일보는 열흘 뒤인 4월 11일자에 ‘이야기그림이라’라는 제목으로 최초의 4칸 만화를 선보였습니다. 동아일보에 흠뻑 빠져 길 가다 행인을 걸어 넘어뜨려도, 귀한 아기가 무릎에서 떨어져도 모르며, 밥 먹으면서도, 30분 머리 깎는 동안에도 동아일보를 보게 된다는 내용을 재치 있게 표현한 겁니다.
‘이야기그림이라’는 ‘그림이야기’, ‘이야기그림’ 등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계속됐습니다. 4월 19일자 ‘동양과 서양’ 편은 부인 앞에서 “네, 잘못했습니다”라며 땀을 뻘뻘 흘리는 서양 남자와 “여편네가 무슨 상관이야, 암탉이…” 운운하는 한국 남편을 대조해 동서양 남녀의 위상을 짚었고, 5월 31일자 ‘제각각 소원’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소년, 다시 젊어졌으면 하는 노인, 장가가고 싶은 노총각, 처녀총각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부부를 그렸습니다.
7월 26일자 ‘서울은행장의 죽음’은 해학과 반전이 있습니다. 큰 부자인 도 참판 댁 작은아들 서울은행장이 죽었다는 기사를 보고 엉엉 우는 남편에게 부인이 “도 참판이 당신 할아버지라도 되느냐”고 하자 “(돈 많은 사람이) 내 할아버지가 아니니까 운다”고 설명하니 부인도 따라 운다는 내용입니다. 부부의 머릿속에 두툼한 돈주머니를 그려 배금주의(拜金主義)를 풍자한 것이죠. 그런데 한 가지. 당시 서울은행은 존재하지 않았으니 ‘도 참판 댁 아들 서울은행장’은 지어낸 가공인물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이야기그림’은 물론 창간호 ‘단군유지’도 동아일보 창간기자인 천리구(千里駒) 김동성(1890~1969)의 작품입니다. 김동성은 첫 해외특파원, 첫 한영사전 편찬자, 초대 공보처장 등 수많은 ‘한국 최초’ 타이틀을 가졌을 정도로 다재다능했습니다. 미국에서 신문학(新聞學)을 공부하며 만화에 관심을 가진 그는 ‘이야기그림’ 등 만화 창작에 그치지 않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도 힘썼습니다. 1923년 잡지 ‘동명’에 최초의 만화 입문이론인 ‘만화 그리는 법’을 11회 실었고, 동아일보 미술담당 기자 노수현에게 만화를 가르치기도 했는데 이들은 1924년 조선일보로 옮겨 훗날 영화로도 제작된 ‘멍텅구리 헛물켜기’를 연재하기도 했습니다.
김동성의 활약으로 한국만화의 산파 역할을 한 동아일보는 1923년 12월 1일자부터 독자투고 만화를 과감하게 1면에 싣는 파격을 선보입니다. 암울한 시기인지라 폭정을 고발하고 민족의 설움을 나누고자 하는 내용이 많았는데 대표적인 게 1924년 11월 5일자입니다. 날카로운 비수를 등 뒤에 숨긴 채 닭(조선인을 비유)에게 모이를 주는 일본 여자를 그린 겁니다. 재갈을 물린 조선청년(언론)의 등에 올라 머리를 물어뜯는 악마를 표현한 1925년 5월 7일자 동아만화는 섬뜩합니다. 이 두 만화는 총독부 검열에 걸려 삭제 또는 발매금지 처분을 받았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