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의 여진이 채 가라앉지 않은 1919년 9월 2일, 일제 제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경성 남대문역에 도착했습니다. 서울역이 생기기 이전 단층의 초라한 역사였죠. 사이토가 귀빈실에서 각국 영사, 식민지조선 귀족, 총독부 관리 등과 인사를 나눈 뒤 쌍두마차에 올라탄 순간 귀를 찢는 폭음이 터졌습니다. 사이토를 노린 수류탄이 날아든 것입니다.
수류탄을 던진 사람은 64세 강우규였습니다. 1919년 식민지조선인을 기준으로 볼 때 강우규는 할아버지였습니다. 이런 노인이 젊은이도 결행하기 힘든 의열투쟁에 몸을 던졌던 것이죠. 강우규의 의거 이후 식민지조선에서는 의열투쟁이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강우규 효과’라고 할 만한 현상이었죠.
하지만 그의 거사에도 불구하고 사이토는 무사히 떠났습니다. 현장에 있던 일본인 기자와 경찰 등 2명이 숨지고 35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사이토를 환영하러 나왔던 식민지조선 귀족들은 얼굴이 노랗게 질렸죠. 이들 대부분은 “해가 지고 일본군의 경계선이 걷히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며 허둥지둥 발길을 돌렸습니다.
강우규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서 체포되기를 기다렸습니다. 경황이 없던 일본군과 경찰은 노인을 범인으로 의심하지 않고 지나쳤죠.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하느님은 사이토를 용서하고 또 강우규를 용서하심인가?’라고 자문하며 천천히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경성에 머물며 2차 거사를 궁리하다 보름 만에 붙잡혔죠.
동아일보 1920년 4월 15, 16일자에는 강우규의 2심 재판 기사가 실렸습니다. 창간 전인 2월 열렸던 1심에서는 이미 사형을 선고받았죠. 그는 재판 내내 노인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당당하게 행동했습니다. 얼굴에는 불그레한 기운이 가득했고 팔자수염을 쓰다듬으며 법정에 들어섰죠. “허리가 아프니 좀 편안한 의자를 내와라”라고 재판장에게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강우규가 살아온 인생이 알려졌습니다. 젊어서 한의학을 배웠고 나라를 빼앗긴 해에 북간도로 떠났으며 5년 뒤 요하현으로 옮겨가 신흥촌을 건설하고 광동학교를 세워 젊은이들을 가르쳤습니다. 3·1운동 영향으로 창립된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노인단의 길림성지부장이 돼 의거를 단행했고요. 사이토가 신임 총독으로 오는 것은 하늘의 뜻을 거스르고 세계의 대세인 민족자결주의와 파리평화회의를 교란한 것이라고 거사 이유를 밝혔습니다.
2심 재판에서 강우규는 원산에 있을 때 머물렀고 수류탄도 감춰놓았던 집의 주인 최자남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최자남이 이미 자백했다고 재판장이 몰아붙여도 공범은 없다고 강하게 말했습니다. 최자남 역시 고문으로 자백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죠. 2심에서도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범들이 풀려날 마지막 기회를 얻기 위해 상고했습니다. 상고는 기각되었죠.
그는 감옥 안에서도 꿋꿋했습니다. 옥바라지를 하러 온 아들에게 변호사는 필요 없다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태연한 자세로 성경을 읽으면서 옥중의 하루하루를 지냈죠. 아들에게는 “네가 만일 내 사형 받는 것을 슬퍼하는 어리석은 자라면 내 자식이 아니다.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너무 없어 도리어 부끄럽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11월 29일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에는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 단두대 위에는 오직 봄바람만 부는구나’라는 사세시(辭世詩)를 읊었습니다.
하지만 동아일보에서는 강우규의 마지막 모습을 찾을 수 없습니다. 9월 25일 총독부로부터 1차 정간을 당해 이듬해 2월 20일까지 신문을 발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서울역 광장에 동상을 세워 그의 굽힘 없는 기개를 보여주게 된 것은 의거 92주년인 2011년이었습니다.
댓글 0